성경이 전하는‘전염병’

하나님 뜻 잘 헤아려 성숙한 신앙으로 이웃 돌보기를 나명균 목사<조은교회>

이땅에 있는 모든 나라와 백성들은 코로나바이러스(COVID-19)로 인해 중대한 상황에 부닥쳐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을 기준으로 142개국에서 17만 2천 명의 확진자가 발행하여 약 7천 명이 사망한 상태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도시가 마비되고, 경제적 손실은 계산 자체가 어려울 정도이다. 이러한 문제는 종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한국 기독교의 경우135년 기독교 역사 중 주일예배를 예배당에서 드리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에 이르렀다.

전염병과 그 역사
사람에게 질병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병원체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는 전염병(communicable disease)은 인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테네 역병으로 인하여 고대 그리스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하여 스파르타에 무너졌고, 로마 붕괴의 원인도 5백만 명이 사망한 안토니우스 역병 때문이었다.

중세 시대가 끝장을 본 것도 쥐벼룩이 매개체가 된 페스트에 의하여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독일에서는 인구의 3분의 2, 영국에서는 인구의 절반이 죽었다. 페스트 퇴치의 실패로 민심은 고스란히 교회로부터 떠나 중세 기독교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갔다.

이후, 17세기 네델란드의 과학자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 19세기 프랑스의 생물학자 파스퇴르에 의해 인공적 면역력을 지닌 백신이 개발되어 광견병, 독감, 인플루엔자, 콜레라 예방에 크게 기여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영국의 세균학자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개발하여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고 죽이는 항생제를 인류에게 큰 선물로 남겼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고 복잡해진 인류 역사에서 전염병은 절대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메르스, 에볼라, 신종플루, 사스 조류독감, 이번 코로나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전염병들이 속출하고 있다.

성경 속의 전염병
전염병의 자취들은 성경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된다. 먼저 출애굽기에 나오는 열 가지 재앙 중, 다섯 번째 재앙이 돌림병(히브리어 데레르는 그 자체로 전염병을 의미)이었으며, 일명 가나안 땅 정탐보고회를 하는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는 가운데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전염병으로 그 백성들을 치리라(민수기14:12) 하셨다.

다윗의 인구조사로 인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염병을 내려 7만 명이 죽은 안타까운 사건(역대상 21장)이 기록된다. 이 외에도 신명기 28장에는 오늘날 말라리아라고 하는 학질에 대한 기록과 애굽에 내렸던 질병에 대한 것을 다시 언급하며, 계속해서 예레미야 14장과 29장, 에스겔 5장, 6장 등 전염병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신약에 이르러 의사였던 누가는 전염병을 언급하며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질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날 하나의 징조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과 섭리 사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에 언급한 성경 말씀과 오늘날 지구상에 계속되는 전염성 질환들을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물론, 구약에서 보는 몇몇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한 심판의 수단으로 사용하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구약의 예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오늘날의 전염병 역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직접 대입시키는 것은 매우 조심성이 필요하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기를 소망해야 한다. 분명한 잘못이 있는 자식 앞에 회초리를 들어야 했던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알아야 하는 듯 말이다.

전염병이 직접 언급된 애굽에 내린 여러 재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애굽인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로 하여금 세상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보내야 함을 깨닫게 함이 목적이었다.

다윗의 인구조사로 7만 명이 전염병으로 죽게 된 경우도 역시 징벌을 통한 죽임이 목적이 아니라, 다윗이 철저히 죄를 깨닫고 회개케 하려 함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전염병이나 재난 등이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된 경우도 분명 있을 수 있지만, 그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놓치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되는 아주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감사로 찬양할 수 없는 단순히 두려움에 벌벌 떠는 존재로 남게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고 있다.

전염병이나 재난, 그것이 범국가적이든 개인적이든 하나님의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준 인물이 바로 욥이다. 욥이 경험한 재난들을 보자. 열 명의 자녀들이 죽었다.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 했던 그는 모든 재물을 잃었다. 욥이 앓은 육체적 질병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잿더미 위에 앉아 깨진 기왓장으로 가려운 몸을 긁었다고 했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욥은 결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라고 했다.

결국, 욥기에 우리 기독교인에게 보여주는 것은 지고하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극에 대해 알게 함이요,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오만해서 안 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함을 인정한 겸손함이다.

다시 한번 부흥하는 기회로
전염병은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변곡점을 찍어 주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지기 시작할 즈음, 즉 한국 초대교회사는 선교사의 역사와 전염병의 역사가 맞물리는 시기였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인가 싶다.

1886년 한반도를 비롯한 주변국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여 8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콜레라 전염병은 1890년, 1895년, 그리고 1902년에는 설상가상으로 가뭄으로 인한 대기근이 같이 찾아왔다. 이 전염병과 가뭄은 조선왕조의 끝으로 치달았다.

조선에 하와이 이민 붐이 인 것도 이 때이며, 백성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두만강을 건너거나 길거리로 나가야 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대한제국은 아무 힘없이 1905년 을사늑약에 손들고 말았다. 천도교를 비롯하여 여러 종말론 집단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는 일대 부흥의 계기로 삼았다.

원산대부흥운동(1903년), 평양대부흥운동(1907년) 등 부흥 운동은 불길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 부흥의 불쏘시개는 바로 선교사들과 의사들이었다. 콜레라 전염병에 맞닥뜨려 선 그들의 헌신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한 편의 교향곡과 같았다.

코로나바이러스 앞에 선 지금의 우리 기독교인이여! 우리도 이 기회를 통해 아프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이웃들을 돌보며, 두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을 배려하며,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 보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서야 한다.

‘코로나19’에 관한 설교

예배 생활 하면서 더불어 사는 길을 모색해야

지금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코로나바이러스(COVID-91)와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상황이 아주 나쁜 만남입니다. 그야말로 전쟁 상태와 방불했을 때, 우리 신앙인들의 신앙, 특히 예배 생활에 대하여 매우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생명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염병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함께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기에 정말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진작부터 예배를 비롯한 모든 모임을 폐하라는 말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 성급한 면이 다분히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멈출 수는 없지요. 한국 교회에서도 135년 기독교 역사에서 주일예배가 멈추게 되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일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안목으로 이 상태를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세상 모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길을 같이 모색해야 합니다. 방법은 분명 여러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본문에는 ‘전염병’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쓴 사람 역시 지금 이 시대의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한 전염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다른 사람, 다른 나라의 전염병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이야기입니다.

신학자들은 오늘 본문 시편 91편의 저자에 대해 두 가지 견해로 나누어집니다. 시편의 제4권이 시작되는 시편 90편의 소제목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91편의 저자 역시, 모세로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신학자들은 다윗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저는 이 시간,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모세나 다윗 두 사람 모두 우리보다 먼저 극심한 전염병과 실제로 맞닥뜨렸던 믿음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과연 그 상황에서 어떤 신앙인의 모습을 보였는가를 살펴보는 것, 매우 중요하리라 봅니다.

하나님께 더욱 의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모세는 출애굽에 앞서 애굽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열 가지 재앙들을 친히 경험했습니다. 출애굽기 9장을 보면열 가지 재앙 중 악질, 악성 종기는 분명히 전염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악질의 히브리어 ‘데베르’는 개역 개정에서는 돌림병이라고 번역된 그 자체가 전염병이라는 의미이며, 악성 종기 역시 작은 알갱이의 재가 공기 중에 날리어 전염되는 그야말로 독종이 생기는 피부염입니다.

다윗 역시 역대상 21장에 기록된 것처럼, 인구조사의 결과 전염병이 돌아 7만 명이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 혹은 다윗이 만난 질병은 이렇게 무서운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사람들은 악한 전염병을 만났을 때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시편91:2)”

우리는 이러한 표현을 시편에서 너무 흔하게 보고 들었습니다. 너무 흔하다고 해서 별 가치가 느껴지지 않고 깊은 감동이 없으십니까? ‘너무 자주 흔하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는 과연 내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내 인생의 피난처로, 요새로 여기며,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의뢰하며 살아가는지요? ‘흔하다, 또 그 소리’라고 치부하지 마시고, 정말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살아가느냐는 말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에 모든 사람이 노출된 상태처럼 정말 어렵고 답답한 일을 만났을 때,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이심을 기억하고 그 날개 안으로 피하십니까? 하나님의 품 안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인정하면서 그의 넓은 품에 안겨 평안을 누리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세나 다윗이 경험한 전염병과 오늘 우리가 만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와 다윗이 경험한 전염병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아가는 하나님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전염병을 보면서 하나님의 잔인성을 말한다면 참 곤란해집니다.

하나님은 살리시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이십니다. 모두가 함께 멸망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구원할 자를 찾아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의뢰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참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시편91:3 이하를 보십시오.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이 너를, 나를,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이런 확신 있는 믿음으로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며 모든 삶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이뿐만 아니라 전염병을 만난 우리의 신앙의 실제 모습들을 몇 가지 생각해 보며 말씀을 마칩니다.

예배의 소중함을 더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크리스천라이프에 ‘주일예배는 생명입니다.’ 라는 캠페인을 시작한 일이 있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 아니면, 주일 아침 출국하지 말자는 등, 실천사항도 몇 가지 제시해 보았습니다. 저는 어릴 적, ‘하나님! 제가 주일을 범하는 일이 없게 해 주세요!’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한국, 혹은 뉴질랜드에서도 이미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주일예배에 못 가는 신앙인들도 있고, 한국은 지자체마다 주일예배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모임을 중지해 달라는 권고가 있었습니다. 명령은 아니고요. 그런 권고가 아니더라도 상황이 더해지면 교회가 자발적으로 그리해야 하겠지요.

주일에 교회 못 간다? 주일예배 교회에서 드리지 못한다? 공예배가 멈추었다?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당황도 하고, 내가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껏 교회에서 예배하던 우리가 그렇지 못할 형편에 처하게 된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바빌론 강가에서 예루살렘을 사모하며 눈물 흘리던 구약의 성도들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도 평소에 아무 불편 없이 드리던 예배의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며 나아갑시다.

성숙의 디딤돌로 삼아야 합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성 때문에 인종차별의 문제도 심각하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민자로 살아가며 인종차별이라는 것에 얼마나 민감합니까? 만약 정말 인종차별을 당하는 그런 현실에 처한다면 이 얼마나 속상하고 분하겠습니까?

며칠 전, 오클랜드의 우리 한인 청소년이 어느 일당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바이러스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으로 취급 당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인종의 구별은 당연히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인종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차별은 없어야 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3: 22).”

세상 사람들은 인종차별이 아니라지만, 인격 무시를 서슴치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숙의 한 단면을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세속적인 흐름에 부화뇌동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결코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생명 사랑이지 생명 무시가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아가는 분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을 지킨다고 감염 위험군으로 들어가면 안 되겠지요. 무모한 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튼, 지금 우리 앞에는 원치 않게도 너무나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극복해 내야겠지요? 이 위기 앞에서 더욱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며, 예배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성숙의 디딤돌 삼아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시편91:14-16에서 하나님은 많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함께 읽어보며 마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아멘.
나명균 목사<조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