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라서 더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이 ‘커피 수레’를 끌고 거리로 나가셨다. 멀리 높은 빌딩이 보인다. 딱 봐도 대도시에 조성된 좋은 공원이다.

수레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니 모두 넥타이에 사원증을 메고 있다. ‘화이트칼라’(의사, 변호사, 대기업에 소속된 회사원 등) 직종의 사람들. 선망하는 직업군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커피는 모두 공짜? 가격표에 ‘무료(Free)’라고 표기되어 있다. 예수님은 왜 선망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커피를 나눠주고 계신 걸까? 상상과 해석은 당신의 몫이다. 참고로 이 그림의 제목이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다’ 라는 것만 밝힌다.

드디어 그림이 팔렸다! 몇 년 전 일본에서 전시를 할 무렵, 이 그림을 본 한 일본 여성이 이 그림을 구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감동이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듯했다. 나 같은 전업 작가들에게 있어 그림 구매자를 만났을 때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있을까?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일본과 같은 문화 선진국에서 구매자를 만났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국위 선양하는 느낌마저 든다. 왜 이 그림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걸까? 궁금했다. 교회를 다니지도 않고 예수님도 모르는 비 기독인이 왜 그림을 사고 싶어 하는 건지……

돌아온 구매자의 대답은, 예수님이 무료로 커피를 나눠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그 ‘무료(Free)’라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분의 이력을 알고 나니 그 대답이 진심이란 걸 알게 됐다.

오직 ‘정직과 성실’을 목표로 살아온 전형적인 일본 교육인. 이분은 평생을 교육자로 헌신해 오신 분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평생 공짜로 뭔가를 받아본 적이 없어 보일 만큼 올곧아 보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료’라고,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로 전할 뿐만 아니라 뇌리에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 뭔가 좋은 이벤트가 없을까? 방법은 오직 하나, 그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선물함으로써 그 사랑을 체험케 해야 한다는 것. 그것도 복사본(Copy version)으로는 안 된다. 원화(Original version)여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 크게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내가 가져가야 할 수익은 어떻게 하나? 겨우 나온 유일한 구매자인데 그나마 그림을 선물하면 나는 무엇으로 먹고 산단 말인가? 나의 영적 전쟁은 아마도 이런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머리 속에서는 계산기가 돌아갔다. 이 전시를 위해 투자한 돈과 앞으로 얻게 될 예상 수익을 분석했다. 치열한 수 싸움이 오갔다. 투자 대비 수익에 무게를 실을 것인가? 메시지를 전하는 일에 무게를 실을 것인가?

이런 분석을 할 때면 마치 내가 수학자가 된 듯 하다. 어떤 경영인보다도 두뇌가 빠르게 회전한다. 하지만 그래도 소용없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누가복음 12:29~31)

눈물을 살짝 훔친 후(아까운 건 사실이다) 정성스레 원화를 액자에 담아 포장했다. 포장하는 내내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꼭 원화를 선물해야 하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니?’ 이미 결정했음에도 질문은 수없이 나의 뇌리를 오갔다. 하지만 메시지를 각인시키려면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하나님께 그분은 수많은 영혼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직 한 영혼이니까.

그림을 선물하려 하자 구매자는 크게 당황하는 듯했다. 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은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나는 선물의 취지를 잘 설명해 드렸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저를 통해 선생님께 표현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선생님은 여러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오직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 뿐인 원화를 드리고자 하니 선물로 받아주세요. 오히려 제가 부탁을 드립니다.’
그분은 약간 충격을 받으신 듯 했다. 어쩌면 그분 인생의 첫 ‘공짜’였을지도.

하나님의 사랑은 무료인데 그래서 더 받고 누리기 힘들 때가 있다(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값을 지불하셨지만 우리 입장에선 무료이다). 너무 좋은 것을 거저 받으면 오히려 당황스럽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하며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 귀한 것을 받으려면 나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내 수준에서 값을 지불해야 한다면 그건 신의 사랑이 아닐 것이다. 적당하고 합리적인 거래겠지. 전능자의 애정이란 그런 수준이 아니니까.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가장 가난한 사람부터 가장 부유한 사람까지, 누구나 받고 누릴 수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복음을 ‘GOOD NEWS’라고 하는 것 아닐까? 정말 기쁘고 좋은 소식이라고.

이 메시지가 그분께 다 전달됐을까? 얼마나 이해하셨을까? 잘 모르겠다. 이후부터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내 역할은 ‘전하는 것’ 까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