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의 예배자

한명수목사<해밀턴장로교회>

레위기3장1절-17절
3.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5.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윤동주 시인은 ‘쉽게 쓰여진 시’에서 말합니다. 암울한 일제 치하의 현실에 그는 무력감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지만 “먹고 사는 것이 힘들다’고 더 많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민생활이 육체적 힘듦도 있겠지만 더 힘든 것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입니다. 백인들보단 아시안들이, 그리고 그들보단 같은 민족, 그 중에서도 가깝게 지내는 분들과 관계를 맺기도, 이어가기도 어렵습니다. 관계의 문제가 원활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버겁더라도 함께 할 수 있는 분들로 인해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광야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화목제사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화목(和睦)이란 ‘서로 뜻이 맞고 정다움’ 이라고 국어사전에서 정의합니다. 영어로는 ‘Reconciliation’ 란 의미로 ‘Peace Offering’ ,‘Fellowship Offering’ 이라고 합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할 때 드렸고, 하나님께 행한 서원을 갚아 주셨을 때, 그리고 하나님께 자원하여 드리고 싶을 때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가운데 유일하게 제사 드리는 사람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화목제뿐입니다. 특별히 가난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먹도록 하셨습니다.

“난 하나님만 의식하고 살면 된다”는 크리스천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라(레위기 7:15)”고 했습니다. 쌓기만 하고 나누려 하지 않은 인간의 욕심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식구’라고 하지 않습니까? 밥을 먹는 사이라는 것이죠. 왜 재벌들과 돈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받습니까? 쌓기만 하고 나누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형제 자매 된 우리들은 예배와 성만찬을 나누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밥을 나누는 한 식구임을 기억하며 교제의 깊이를 더해야 할 귀중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화목제를 드릴 때 먼저 하나님께 ‘기름, 간 그리고 콩팥’을 제단에서 태워 향기롭게 받으시도록 했습니다. 기름은 ‘가장 살찐, 훌륭한, 골수’라는 원어의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가장 값어치 있게 여겼기 때문에 먼저 선택했다고 합니다. 창세기 4:4 “아벨은 자기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3장은 ‘기름’과 관련된 말이 17번 정도 언급됐습니다. “피를 먹지 말라”는 말은 익숙히 알고 있지만 ‘기름’이 강조된 것은 좀 낯설지 않습니까?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레위기 3:16)”고 하셨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기름을 먹지 말 것이요, 기름을 먹으면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레위기 7:23-25)”고 했습니다. 9절의 ‘미골’은 양의 꼬리를 말합니다.

소의 꼬리부분은 기름기가 많고 살도 붙어 있고 사람의 몸을 회복하도록 돕는 음식임을 알고 있습니다. 화목제사 드릴 때 가장 귀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욕심을 부리다 이웃을 잃어버립니다. 우리 주변의 건강의 문제는 못 먹어서가 아닙니다. 너무 기름진 것, 맛난 것을 많이 먹는데서 원인이 있지 않습니까?

지방인 기름은 오늘날 콜레스테롤이 많아 성인병의 원인이 되지 않습니까? 지방이 몸에 많다는 것의 신앙적 의미는 정결과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구별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삶에 내 삶의 목표와 이유를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목케 하는 제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에베소서 2:14)”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린도후서 5:18)”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어그러진 관계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생명의 빵으로 오셨습니다. 성경은 초대교회 신자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사도행전2: 42)

평화를 위협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여러 현상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무엇이 우리를 가장 위협하고 있습니까?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입니까? 성적타락의 여러 행태들입니까? 보수와 진보의 견해차이입니까?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가깝게 지내야 할 사람들과 등지고, 외면 한다면 함께지만 서로 땅끝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힘에 의한 복종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화는 섬김과 나눔을 통한 공동체성의 회복입니다.

어떻게 하면 화목해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의 관계, 목회자와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가 화목해야 진정한 평안이 있음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차이와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넉넉함이 요청됩니다. 우리끼리의 만족을 넘어 복음의 가치와 영향력을 세상 속에서 빛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자기들만의 주의, 주장, 경험과 전통을 강조하면 불화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물을 내가 차지하려 들면 평화는 깨집니다.

참된 예배를 말하면서 내 눈과 귀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면 안됩니다. 예배가 ‘좋다, 은혜롭다, 어떻다’고 할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내 자신이 먼저 예배 드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예배자로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하십시다.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관계 회복 아닙니까? “너희들도 나와 같이 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와 신본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영광과 안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면 부끄러운 삶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사무엘상 15:22)”고 하셨습니다. 내가 집착하는 경험과 가치가 나를 해롭게 할 수 있습니다. 내 판단력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나머지는 이웃과 더불어 화목의 잔치를 기꺼이 베풀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