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만족하셨는가?

전희동 목사<오클랜드디아스포라교회>

“사람이 비록 장수하여 천 년의 갑절을 산다고 하여도 인생의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00세 시대의 그 한 날 한 날이 만족스럽지 못했더라도 켜켜이 쌓아 올린 한 세기가 인고(忍苦)의 세월이었다 치부(置簿)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훨훨 털어 버릴 수 있을까?

일찍이 다양한 인생 실험을 통해 ‘인생 실험 보고서’를 썼으나, 정작 본인은 실험 재료였던 ‘쾌락’이라는 독에 중독되어 후유증을 앓았던 솔로몬이 언급한 단어가 ‘인생의 만족’이다. 그는 이 실험을 위해 그가 가지고 있는 지혜와 지식, 왕권과 재물을 쏟아부었다.

“나는 혼자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할 것이니, 너는 내 마음껏 즐겨라. 그러나 이것도 헛된 일이다. 알고 보니 웃는 것도 미친 것이고, 즐거움은 쓸데없는 것이다. 지혜를 갈망해 온 나는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렇게 사는 것이 짧은 한평생을 가장 보람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여러 가지 큰일을 성취하였다. 궁전도 지어보고 여러 곳에 포도원도 만들어 보았다.”(전도서 2:1-4, 표준새번역)

사람들은 ‘즐거움을 만족이라고 생각하고 쾌락을 행복이라 착각한다. 많은 것을 가지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며, 내가 원하는 일이 성취되면 만족할 것이라 치부한다. 사람들은 오늘만 참으면 내일은 괜찮아질 것이라며 오늘도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다.’

한때 베스트 셀러에 올라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던 ‘리처드 칼슨’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에 나오는 한 대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끝없이 뒤로 미루면서 살아간다. 물론 이는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매 순간, ‘언젠가는’ 행복해지리라 믿으며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낸다.

사람들은 지불해야 할 청구서가 다 해결되고, 지겹기만 한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거나 열심히 일해서 일찍 승진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또 다른 일들이 해결되면 삶이 즐거워질 것이라고 자신에게 타이른다. 그러고는 어린 자녀에 대해 걱정하면서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마음에 여유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좀 더 자란 후에는, 상전같이 다루기 힘든 10대가 된 자식 걱정으로 편안할 날이 없다.

이렇게 우리는 인생의 각 단계에서 지금 이 시기를 벗어나게 되면 틀림없이 행복해질 것이라 믿는다. 최선을 다한 후, 좋은 차를 사고, 멋진 휴가를 떠나고, 결국에는 은퇴를 했을 때 비로소 완전해지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행복에의 기대만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는 가운데 인생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하지만 실제로는, 행복을 움켜잡기에 ‘지금’ 보다 더 나은 때는 없다. 지금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때가 언제란 말인가? 어찌됐든 인생에는 항상 어려운 도전들이 넘쳐나기 마련이다. 이 점을 받아들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해지기로 ‘결심’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리처드 칼슨은 지연된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고 설파한다. ‘당신은 지금, 만족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오늘 행복하겠다고 결심한다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시 솔로몬의 ‘인생 실험 보고서’로 돌아가 그가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살펴보자.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전도서 12:13,14 표준새번역)

결국 솔로몬은 ‘인간은 스스로 만족하며 살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고 진정한 만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족은 재산의 많고 적음, 소원의 성취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얻어지는 것이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편109:9)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1-13 표준새번역)

하나님을 믿은 세월의 연수를 자랑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도 바울이 누렸던 만족을 지금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만족은 근시안적인 사고로는 결코 찾아낼 수 없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솔로몬은 심판주 하나님을 결론에서 언급하고 있다. 100년의 세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구한 세월이 예비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준비하는 자에게 이 땅의 대소사(大小事)들은 한 줌의 흙과 같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로서 누리는 만족은 하해(河海)와 같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의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걸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16-19 표준새번역)

인간욕망의 화살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이웃을 향해 가고, 그 해악은 끝없는 비교를 통하여 비참의 바닥에 이르게 하며, 질투의 불에 마음을 데이게 한다. 이 욕망을 십자가와 함께 못 박을 때 우리는 비로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게”되며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갖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디모데전서 6:7)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다. 만족은 욕망이 페이드 아웃(fade out)될 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주어진 날 중 오늘은 몇 번째 날일까? 오늘이라는 날이 불만으로 허비되어 떠내려가지 않게 소망의 밧줄이 계선주(mooring post)되신 그리스도께 단단히 동여매어 졌는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