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오직 한 사람 개츠비, 이 책의 주인공인 그 남자 만은 예외다. 개성이라는 것이 멋진 몸가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개츠비라는 인간에게는 뭔가 개성이 있었다. 인생을 대단히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민감성이라고나 할까……그것은 희망을 생각하는 천부적인 재능이며,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앞으로도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는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개츠비(Gatsby)를 닉 캐러웨이(Nick Carraway)가 회상하는 내용이다. 닉의 1인칭 소설로 전개되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는 미국 작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소설로 1925년에 발표되었다. 여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황금을 가져야 했던 한 남자의 비극적 로맨스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은 일명 ‘재즈 시대’라 불리는 1920년대의 미국이다. 1차 세계대전의 승전 후, 미국은 마치 재즈의 감미로운 선율처럼 풍요를 누리며 향락과 사치에 취해있었다.
작가는 이 소설에 세 그룹의 인물군을 배치한다. 톰과 데이지. 그들은 부유한 상류층 집안 출신이다. 귀족이 이끌던 구대륙 유럽을 상징한다. 반면 개츠비는 신대륙인 미국을 대변한다. 그는 날 때부터 가난했다. 맨주먹으로 부를 일군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글머리에 소개된 닉의 회고대로 희망과 낭만이 넘치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닉과 베이커가 있다. 제3자격인 이들의 눈을 통해 구대륙과 신대륙 인물들의 삶이 객관화된다.
잠깐 줄거리를 살펴보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개츠비는 어떻게든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군인이 된 그는 한 파티장에서 데이지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신분의 격차로 인해 비극이 예고되어 있었다.
개츠비가 전쟁에 참전하면서 둘은 연락이 끊기고 만다. 데이지는 대부호 톰과 결혼하게 된다. 데이지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 톰은 바람을 피웠고, 데이지는 톰의 불륜을 눈치채고도 모른 채 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개츠비는 미국에서 금주령(1920-1933)이 제정되자 주류 밀수입으로 막대한 돈을 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다시 되찾으려 했다. 뉴욕시 인근의 롱 아일랜드 해협에 있는 웨스트 에그에 거대한 저택을 구입해 연일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파티를 좋아하는 데이지가 언젠가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닉은 개츠비의 이웃으로서 친분을 쌓게 되고 점차 그의 숨은 사연을 알아간다. 데이지를 향한 그의 뜨거운 연정도 알게 된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남편 톰에게 “당신을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해주길 원한다. 그 한 마디면 개츠비는 지난 5년간의 아픈 이별을 다 잊어버릴 수 있었다. 데이지가 톰과 이혼해 그에게로 돌아와 주길 바랬다.
그러나 정작 데이지는 사랑보단 부유한 삶에 더 관심이 있었다. 개츠비와 재회한 그 극적인 순간에도 그녀는 개츠비가 보여주는 영국제 셔츠들을 보며 “너무 슬퍼. 한 번도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를 본 적이 없거든.”하며 울먹일 정도였다.
개츠비의 사랑은 맹목적이었다. 데이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런 개츠비를 닉은 좀처럼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점차 그의 사랑에 간직된 순수성이 느껴졌다. 마침내 닉은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 개츠비에게 이렇게 외친다.
“그 인간들은 썩어 빠진 무리에요. 당신 한 사람이 그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해요!”(They’re a rotten crowd. You’re worth the whole damn bunch put together.)
닉은 두고두고 그때 그 말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간 한 번도 개츠비의 행동에 찬성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그에게 해 준 유일한 찬사였다. 아마도 닉은 배금주의 세상의 더러움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과도 같은 개츠비의 사랑을 두둔하고 싶었을 것이다. 개츠비의 사랑에 몰입되면 독자들은 그제서야 이 소설의 제목에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기실 위대한 개츠비는 위대한 사랑을 뜻한다.
그러나 소설예배자는 또 다른, 어찌 보면 정반대의 감회를 갖는다. 개츠비는 위대하다기보다, 실인즉 허무하다. 그 허무는 개츠비의 장례식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개츠비가 죽게 된 사연을 알아보자.
어느 날 밤, 개츠비와 데이지가 탄 차가 머틀이란 여인을 차로 치어 숨지게 했다. 공교롭게도 머틀은 톰의 내연녀였다. 이 차는 개츠비의 것이었지만, 사고 당시 운전은 데이지가 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위해 이 사실을 숨긴다.
그런데 톰이 개츠비를 모함했다. 죽은 머틀의 남편인 윌슨을 찾아가 그의 아내를 치고 달아난 운전자가 개츠비라고 거짓으로 말한다. 화가 나 개츠비를 찾아간 윌슨은 그를 총으로 쏴 죽여버린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지키려다 그렇게 죽었다. 그러나 데이지는 그의 죽음을 알지도 못한 채 톰과 여행을 떠나고 만다.
개츠비는 매주 수백명의 손님을 위해 성대한 파티를 개최했지만 정작 개츠비의 장례식은 쓸쓸하기짝이 없었다. 장례를 주관한 닉과 개츠비의 아버지, 그리고 대여섯명의 하인을 제외하면 조문객이라곤 단 한 사람, 어떻게 장례식에 오게 됐는지 알 수도 없는 올빼미 안경의 남자 뿐이었다.
이 소설엔 개츠비의 장례식 장면에 모든 메시지가 집약되어 있다. 마치 개츠비의 장례식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소설 같다. 고독과 허무. 이 장례식이 독자에게 전해주는 느낌은 그것이다.
성경 골로새서 3장2절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개츠비의 사랑이 위대했다지만 그 본질은 땅의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13절에서 “그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쉬운성경)이라고 말씀하는 그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 같아 보이지만, 실은 훅 불면 날아가버릴 먼지 같은 욕정. 그 허무한 끝이 장례식 장면에 집약되어 있다.
데이지에 모든 걸 바친 개츠비는 아이러니하게도 데이지마저 잃고 그 자신도 파멸되어 버렸다. 매주 그의 파티에서 먹고 마셨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가 죽자 다 사라져버렸다.
전도서 1장2절에 이르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했던 탄식이 절로 터지는 허무한 결말이다.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자. “나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하길 원하는가?”질문을 바꿔보자.“ 그렇다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소설은 닉의 독백으로 끝난다
“우리는 내일 더 빨리 달려서 더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가면서도 물결을 거슬러 노 젓기를 계속할 것이다.”
닉의 말처럼 우리가 물결을 거슬러 노 젓기를 계속할 수 있다면, 그건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라면 우리 역시 개츠비식의 허무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시급히 그리고 완전히 방향을 바꿔야 한다.
이해인 수녀의 시 ‘꿈 일기 2’를 읽으며 글을 맺는다.
목마른 이들에게 물 한 잔씩 건네다가 꿈이 깨었습니다 /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 살아있는 모든 것을 다시 사랑해야겠습니다 / 누구에게나 물 한 잔 건네는 그런 마음으로 목마른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