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 온 지 15년이 되어간다. 아들과 딸은 3살, 2살에 왔는데 이제 13학년과 12학년이 되었다. 아들은 이제 큰 도시에 있는 대학으로 가게 될 것이다.
최근에 나는 ‘내가 이 땅 뉴질랜드에 무엇 때문에 왔으며’,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물음에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리 좋은 결정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첫째, 자녀들과의 거리감이 나를 힘들게 한다. 오래전 성경공부를 하던 한 청년이 ‘목사님! 이제 우리들 집에 데려와 밥으로 섬기시는 것 그만하시고, 성경공부도 해주지 마시고, 그 힘과 에너지를 자녀들을 위해서 해주세요’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기에 목회자의 집에 와서 밥 먹고 성경공부를 하는 목회자를 보면서 미안해서 하는 말이었다. 교회 특성상 90퍼센트가 유학생들이라서 늘 먹이고 초대하여 섬기는 사역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목회자도 늘 말하는 것처럼 내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다정다감한 아빠라고 생각했다.
내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늘 가정 밖에서는 호인이요,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분이었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그렇지 못하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아버지처럼 가족들에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고, 결혼해서는 아내를 위해서, 자녀가 생기면서는 자녀를 위해서 사는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신학대학에서 가정 사역 과목을 50학점도 넘게 듣고 건강한 가정생활을 이루어 가기를 소망했다. 결혼 전에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하는 결혼예비학교와 결혼해서는 젊은 부부학교 등을 하면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땅 끝 인버카길에서 목회하면서 두 아이를 온전히 키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로, 목회자로 이 땅에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교회에서 유일한 주일학교 선생님이 엄마이며, 교회에 피아노 반주자가 없어서 5살 때부터 늘 교회 반주를 해야 했던 아들, 그러면서도 늘 들어야 했던 아빠의 설교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 전, 13학년이 된 아들이 말한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성경 말씀에서 남은 구원하고 자신은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평생에 복음 전하는 자로 살기로 고백하고 달려온 지난 시간이 아픔으로 다가왔다.
아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반항이 심해지고, 거리감이 더 생기는 시간이 늘어갔다. 나는 우리 아들이 한국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겉만 한국 사람이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뉴질랜드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한국인의 정서, 부모에 대한 공경심, 정으로 통하는 사이가 아니라 자기 이성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이기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아들을 보면서 어쩌면 이것이 뉴질랜드에 사는 아들의 가치관이 된 것 같다.
뉴질랜드는 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포기한 나라이다. 동성애와 동성결혼이 합법인 나라이며 학교 선생님이 동성연애자이고 친구들 또한 동성연애자들이 있으며 수업 시간에 동성애를 가르치는 사회 구조가 되었다.
누구든지 이것이 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 이상 교사를 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하는 편협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는 듯하다. 이러한 사회 구조에서 어떻게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버지로, 목회자로 이 땅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혹시나‘내가 가족들을 데리고 뉴질랜드 오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아들이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오늘도 믿음의 눈을 들어 주를 바라봄
두 번째는 나의 성장의 문제이다. 내가 사는 인버카길 지역은 한인교회가 하나이다. 어느덧 이 땅에 온 지 만 14년이 되었다.
마음을 나누며 배울 수 있는 다른 목회자와의 교제가 없으며, 가끔 큰 도시에서 모이는 목회자들의 모임과 세미나, 컨퍼런스는 그림의 떡이다.
오클랜드로 가려면 비행기 직항이 없어서 두 번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한다. 숙박도 해야 하는데 작은 교회 목회자가 그러한 경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스스로 자신의 영성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매일 저녁 9시부터 10시까지 성도들과 함께 기도의 시간을 갖고 새벽예배와 금요기도회를 한다. 더 열심히 모이고 예배하며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선교지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한국에서 한 번도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는 청년들이 유학 와서 외롭고, 사람 만나고 싶고, 밥 먹고 싶어서 오는 교회이다. 그러한 청년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이 땅에 살아가는 힘을 얻고는 한다.
나는 과연 성장하고 있는가? 나는 도태되고, 아들은 이 땅에서 자신이 비기독교인이라는 고백을 하며,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나는 오늘도 믿음의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본다. 내가 진실한 마음과 정직으로 주를 위하여 이 땅 뉴질랜드 땅끝에서 목회하며 보낸 지난 14년의 세월과 부족하지만 사랑으로 돌봤던 아들이 언젠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소원해진 관계가 회복 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