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스트처치의 그날

5

그날은 교대를 위해 회사 차량으로 이동하다 해글리공원 근처 한 사거리에서 신호대기 중이었습니다.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아 열어놓은 창문 너머로 멀리 두 명의 무슬림 청년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크라이스트처치의 유명한 모스크 근처였고 무슬림들의 금요 기도시간 즈음이니 하나 이상할 것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무언가 부딪혀 깨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고 두 청년 중 흰색 전통의상을 입은 청년이 쓰러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함께 있던 다른 청년이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모습도 보았구요. 처음엔 그것이 심장마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 굉음은 의심스러웠고 청년의 행동이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직선거리로는 가까웠지만 차로 이동하여 도울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고, 주변에 다른 이들이 도우러 다가가고 있었던 데다가, 교대 시간도 임박하여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소 많은 경찰차가 긴박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예삿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시 근교 시골에서 간혹 일어나던 갱단들끼리 총격전이 시내에서 났나 보다 정도로만 여겨 무심히 교대지로 이동해 버스로 교대하여 올랐습니다.

그 때로부터 30분쯤 지났나 보네요. 운행 중에 카톡과 문자, 전화벨이 교차로 울려대 큰 일이 난 것을 직감했습니다.

당연히 운전 중엔 휴대전화를 만질 수 없기 때문에 들여다보지도 않았는데 너무 자꾸 울려대니 불길한 생각이 들어 타이밍포인트에서 잠시 문자를 확인했습니다.

그랬더니 가족들이 아빠를 걱정하는 문자와 전화가 빗발쳐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회사 무전기도 난리가 났습니다.

지금 즉시 승객들을 내려놓고 복귀하라고 무전이 떨어졌습니다. 상황을 모르는 기사들은 무슨 일인가 하여 계속 확인하고 확인하고 확인하고… 회사 상황실은 계속해서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저는 마침 반대편 종점에 도착했기에 차를 돌려 회사로 복귀했습니다.

회사에 돌아오고 난 후에야 비로소 무슨 일인지 감이 잡혔습니다. 백인우월주의자이자 반이민주의자, 반이슬람주의자인 28세 호주 청년이 해글리 공원 바로 옆 모스크에서 총기를 난사해 수십 명의 사람을 해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전 세계 영어권 나라 중 테러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뉴질랜드에서, 그 중에서도 가장 안전하다는 크라이스트처치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휴게실 TV에서는 계속해서 그가 SNS를 통해 업로드했다는 영상이 편집되어 방송되고 있었고 그가 도주 중에 길가에 있던 무슬림 청년에게 샷건을 발사했던 것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순간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본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라니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충격의 순간을 직접 목격하게 되다니요.

먼발치에서 목격한 것이라 그 충격의 강도가 그다지 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터라 순간 멍한 상태로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카톡이, 문자가 쏟아졌습니다. 한국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일단 모두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 진정을 시켜드렸습니다. 오후 늦게 운행정지가 풀려 다시 운행에 돌입해야 했습니다.

아직 용의자가 몇 명인지도 확인이 안 된 상태였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제가 운전하는 버스는 사건 지역 인근을 지나야 하는 노선이었습니다. 순간 두려운 마음이 일기는 했으나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기도하며 출발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무서운 현장 인근을 지나면서도 오로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평안한 마음으로 운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무사히 운행을 마치고 복귀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회사 문을 나섰을 때는 학교의 폐쇄령도 해제되어 학생, 직장인 모두가 일제히 귀갓길에 올라 크라이스트처치의 모든 차들이 시내로 쏟아져 나온 듯 차량정체가 심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평소에도 퇴근길 차량이 몰리던 지역이었던 데다 경찰이 그 인근을 통제하면서 시내에서 주택가로 갈 수 있는 길들이 상당히 제한되어 극심한 정체가 있었습니다. 평소 20분이면 가던 길을 1시간 반 이상 걸려서야 귀가할 수 있었으니까요.

집에 오는 길에 아내와 통화를 했습니다.
“이제 당신만 무사히 귀가하면 온 가족 모두 무사귀환이에요.”

오랜 여행(?) 끝에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의 하루 일을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계속해서 일하러 간 아빠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아 많이 속상해했다고, 하여 엄마와 통화하며 아빠가 통화가 안 된다고 통곡을 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큰 딸아이가 너무 대성통곡하며 전화를 해서 옆에 한국말도 못 하는 키위친구가 큰일 난 줄 알고 위로까지 해 주더랍니다. 자기들도 학교가 폐쇄되어 학교 안에 갇혀있었으면서 말이지요.

이 와중에 저는 몇 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일단 테러 사건에도 불구하고 운행을 감행해야 했던 대중교통 기사로서의 역할을 통감했습니다.

대중을 위해 땀을 흘리며 돈을 버는 사람으로서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웃을 위해 일해야만 하는 사명을 새로이 했다고 해야 할까요?

또한 지진 이후에 여진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또한 동료기사가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해야 했던 다른 선배기사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할까요?

다시 한번 아무 이름, 공로 남지 않아도 이웃을 위해 묵묵히 책임을 다했던 이들의 노고에 대해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다녀오겠습니다’하고 집을 나설 때 그 모습 그대로 저녁에 온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에 대한 감사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가족 모두 무사히 하루를 마치는 일은 평범한 일상이 아닌 대단한 기적 아닙니까?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무섭고 어렵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기적인가요?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니면 우리는 한 순간도 안전할 수 없음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건 후 첫 주일예배를 드리면서는 한 순서 한 순서가 얼마나 귀하게 여겨지던지요. 함께 예배하는 지체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해 보이던지요.

이렇게 소중한 것을 모르고 살았던 나 자신의 나태함에 회개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범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사람들에게‘반이민’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 자신은 용단을 내려 행동한 젊은이로 남고 싶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백인중심의 사회를 파괴한 침입자(이민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뉴스를 통해 나오는 그의 행동들을 볼 때, 그는 그냥 자신이 처한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그저 ‘총질+살인’을 하고 싶었던 미치광이로만 보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사회적 불만을 표출함에 있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폭주하는 데에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인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의 방식을 보았을 때 그도 결국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불쌍한 영혼이었음을 보았습니다. 그가 만약 사랑 받고 소중함을 느끼며 성장했다면 내게 소중한 것이 있듯 다른 이들도 소중한 것이 있으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소중함을 존중했을 것입니다.

인류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의견대립’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생각해 낸 사고의 기준으로는 온통 차별과 불합리투성이일 뿐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시각을 갖게 된다면 주변 모두를 사랑의 대상으로 볼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며 그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앞뒤가 바뀌는 것 같아도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또한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차별을 끌어들인다면 그 차별은 또 다른 반발을 불러 결국 또 다른 더 복잡해진 차별을 만들게 될 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이 땅 위에 차별도, 미움도, 시기도, 폭력도, 복수도 없는 미래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지체를 바라보며 긍휼함으로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 도시 위에 이름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향하는 우리의 긍정적인 미래가 열리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