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Care giver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노인 한 분을 만났다. 그때 그분의 나이가 99세였고, 올해 4월이면 101세가 된다고 하니 벌써 3년이 지났다.

보통의 노인들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흥미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런데 그분은 조금 달랐다.

자신의 나이를 의미 있다고 생각했고, 자랑스러워 했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장수의 복을 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한 행복한 노인을 만났다
그는 의사였고,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그는 여러 번 자신이 빌리 그래함이 오클랜드 집회에 강사로 참석했을 때, 전도집회 실행위원이었고, 빌리 그래함과 함께 식사하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슬하에 자식들과 손주, 그리고 증손주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63명의 후손들을 거느린 유복한 노인이다. 지금도 오클랜드 전역의 집과 부동산을 통해서 많은 수입이 들어오는 부유한 노인이기도 하다.

주님께 받은 더 큰 축복은 그의 정신이 온전한 것이다. 나이가 들어 생기는 건망증은 있으나, 치매의 증상은 없다. 이런 그의 건강은 어려서부터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던 결과라고 한다. 그는 주께 큰 은총을 입은 자이다. 신앙의 선배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그분을 귀히 여기며 돌봐 드렸다.

그분을 돌보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를 돌보는 것이 짜증 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를 돌보는 손길이 거칠어졌고, 그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기쁘지 않았다.

특별한 문제가 새로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아침마다 그를 돌보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물론 돌보기 쉬운 분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서 손이 많이 가는 고객이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분은 아니었다.

그분을 돌보는 것이 탐탁치 않았던 이유는 그분의 변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었다. 본인이 의사로서 오랫동안 메디컬 크리닉을 직접 운영했기 때문인지, 모든 것을 본인이 직접 확인해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잘 해주어도 자신이 직접 만지고,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주일에 6일간을 3년동안 아침마다 목욕을 시켜드렸더니, 그분의 샤워스타일과 샤워 후에 하는 행동, 연고를 바르고 옷을 입는 과정이 마치 내가 샤워하는 것처럼 익숙해졌다.

그분은 나이가 들어서 성인용 기저귀를 항상 차고 있다. 그래서 샤워 후에 기저귀를 갈 것인지, 밤새 착용했던 그 기저귀를 다시 사용할 것인지를 샤워하기 전 결정해야 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분이 재정적으로 넉넉했기에, 더러운 기저귀를 굳이 다시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내가 밤새 착용했던 기저귀를 버리고 새 기저귀를 사용하려고 하면, 자신이 착용했던 기저귀를 보여 달라고 한다. 본인이 직접 그 기저귀를 뒤집어서 그것이 얼마나 더러운지 직접 확인한다.

더러운 기저귀를 확인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유쾌하지 않다. 샤워를 마치면 뒷정리를 하면서 불을 끄고, 히터를 끈다.

그런데 이 일마저 나에게 맡기지 못하고, 전등을 직접 소등한다. 샤워부스 정리를 위해서 나는 다시 전등을 켜야 한다.

이런 일들이 매일같이 반복되었지만, 이전엔 그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분의 그런 행동이 나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분의 성격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연말부터 그 노인의 태도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분이 변한 것이 아니라, 지난 3년간 자신을 정성껏 돌보았던 나를 아직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화가 났다.

“그래서 15년 전 재혼한 아내가 그에게 그렇게 퉁명스럽게 반응했구나!”라고 감정적인 공감대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그분을 대하는 내 태도가 조금씩 퉁명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리고 이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갔다.

너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기도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왜 화가 난 것이니? 무엇 때문에 불평하는 것이니?” “3년이나 돌봐 드렸는데 이 노인이 아직도 나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뭐든지 자기가 만지고, 보고 확인하려고 합니다. 자신을 그동안 정성껏 돌보았던 사람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화가 납니다.”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너도 그래, 너도 마찬가지야!” “넌 3년 동안 돌보았던 너의 마음을 몰라주기 때문에 화가 났다고 했지? 그 노인을 보면서 답답해하던 너의 마음이, 내가 널 보는 나의 마음이야!”

갑자기 지난 세월 동안 지내왔던 내 삶의 흔적들이 비디오 파일처럼 지나갔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다. 지금 와 돌아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기저귀를 펴서 자신의 눈과 손으로 확인하려 했던 그 노인의 완고함이, 불신앙이 나에게 있었다.

내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 겉으로는 태평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염려하고 근심한다. 나는 주님이 계시며,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지만, 그래도 손과 눈으로 확인하면 더 큰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난 모험이 아닌, 안정된 여정을 선택하려고 한다.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나를 그렇게 불편하게 만들었던 그 완고한 노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서 있는 바로 내 모습이었다. 그 노인의 완고함이 그렇게 화가 났던 것은, 그분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 노인은 여전히 기저귀를 보여 달라고 한다. 말없이 기저귀를 그분이 보기 좋게 건네 주었다. “This is O.K. not dirty!” 더는 논쟁하지 않았다. 해 달라고 하는 대로 따랐다. 내일 엉덩이가 벌게지면 연고를 발라주면 되니까!

이후의 일은 나의 일이 아닌데, 너무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내가 못하면 하나님이 하시면 되는데, 하나님의 몫까지 내가 챙겼다.

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 그분의 말씀만 전하면 되는데, 하나님이 하실 일까지 나의 일인 줄 알고 속상해하고 염려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나님이 하실 일들이 기대되기 시작한다. 내일은 어떤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