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이게 무슨 냄새냐?”
“혹시 너 아냐?”
여름으로 들어가는 따뜻한 어느 날,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 명칭)운동장에 줄을 서있던 아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한 반에 70~80명의 학생들이 각 학년마다 15반까지 있었으니 정말 아이들이 많았다.
개미 떼 같이 줄을 맞추어 서있는 아이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교장선생님의 훈화가 오래 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각 반의 맨 앞에는 선생님들이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두어 명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기어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냄새의 근원을 찾으려 한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오히려 나도 냄새가 난다며 그 녀석들 보다 더 오버해서 킁킁거리고 코를 막았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화장실에서 나야 하는 그 냄새가 내 온몸에서 나고 있었다. 이제 내가 그 냄새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앞쪽에 계시던 몽둥이를 든 선생님이 우리 쪽으로 이동을 하셨고 나는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누구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의 안 좋은 기억들이 하나씩은 있다. 나에게는 가난이 그것이었다.
11가정이 방 하나에 부엌 하나씩 붙어 있는 산동네에 살았다. 사람들은 한 건물에 그렇게 많은 가정이 붙어 있는 건물 모양이 하도 희한해서 1자 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건물 모양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침마다 벌어지는 ‘화장실 전쟁’이었다.
11가정이니 대략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달랑 2개의 공동화장실을 사용했다. 그것도 지금은 보기 힘든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1년에 한번씩 무밭을 하는 아저씨가 그것들을 퍼가기 전까지 사람들은 아슬아슬하게 차오르는 그것들을 눈으로 보며 일을 봐야 했다. 그리고 혹시 학교 갈 시간이 다되어 급하게 화장실을 다녀오게 되면 온몸에 화장실 냄새가 밴 채로 학교로 달려 가야 했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난 커서 절대로 목사가 되지 말아야지. 우리 아버지처럼 경제적으로 무책임한 가난한 목사는 절대로 되지 말아야지……’
그러나 하나님은 참 재미있는 분이시다. 그렇게 결심하며 살던 나를 결국 목사로 만들고 마셨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물질에 대한 상처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돈에 대하여 청렴한 척, 돈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척, 속과 달리 더 오버하는 목사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이 어릴적의 상처란 놈은 정말 끈질기게 따라 다녔다. 결국 10년 목회를 마무리하고 떠나는 마당에도 혹시나 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성도들과 내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을까 예민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교회 항존직들이 정성껏 결정한 퇴직금을 받지 않겠다고 반대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마지막 파송예배에 들어온 한 주치 헌금으로 퇴직금을 대신하자고 고집을 부렸다.
어쩌면 10년 씩이나 사역하고 떠나가는 젊은 목사와 그 가정을 안타까워 하는 교회 어른들의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버릇없는 고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멋있는 목회 철학도 아니었고 물질주의로 망가져가는 한국교회에 대한 개혁의 의도도 전혀 없었다. 다만 어린 시절 상처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분명한 증거일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시간이 흘러 마지막 파송예배 시간이 되었다. 우리 성도들은 예배 후 만찬 준비로 하루 종일 분주했고 나는 교회 내부에 예배 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본당에 들어갔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잘 모르고 신나게 뛰어 노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하기까지 하다.‘대부분 뱃속에 있을 때부터 봤던 녀석들인데…… 얼마나 보고 싶을까?’
그런데 그 중에 한 녀석이 내 앞으로 막 뛰어가다가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나에게 쭈뼛거리며 와서는 이렇게 속삭인다.
“목사님 나도 했어요”. 처음에는 잘 못 알아 들었다.“그래? 평강아, 뭐를 했는데?”“그거 있잖아요, 목사님 가시는데 하는 거…… 나도 조금 아까 했어요”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녀석이다. 엄마 아빠가 열심이라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내가 전하는 설교를 듣고 자란 녀석이다. 자기가 뭘 했는지를 알려 주려고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곳을 보니 헌금함이 보인다.
‘아니, 헌금이라는 단어도 모르는 아이가 무슨 헌금을 했다는 건가? 혹시 아이 엄마가 아이한테 헌금하라고 시킨 건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때마침 아이의 엄마가 본당에 앉아 있기에 데리고 가서 엄마의 손에 아이를 넘겨주며 이야기했다.
“집사님, 평강이도 헌금을 했다네요”
아마 그 말 속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왜 헌금까지 강요하셨냐?는 원망이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이와 엄마를 남겨 두고 뒤를 돌아서서 본당을 나가려는데 뒤에서 평강이가 큰 소리로 외친다.
“아니에요, 목사님!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에요”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크게 때리는 것 같았다. 나는 차마 뒤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사무실로 들어가 한참을 울었다. 내 맘속에서 돈에 대한 자존심과 상처로 몸부림치느라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보냄 받는 자의 기쁨과 감격’이 바로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다.
내가 웰링턴에서 꿈꾸는 교회는 선교적 교회이다. 선교적 교회는 한마디로 보내는 교회이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을까 고민할 때 선교적 교회는 “어떻게 하면 잘 보낼까?”를 고민한다.
그런데 끌어 들이는 교회에서 보내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실제로 잘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왜 보내는 교회가 되지 못하는지 그 진짜 이유를 알았다. 정말 잘 보내는 교회가 되려면 먼저 내가 보냄 받은 은혜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혼자 알아서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자기 능력대로 사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교회, 그리고 복음은 좀 다르다. 보냄 받은 감격과 은혜가 없으면 절대로 다른 사람을 보낼 수가 없다. 난 그것도 모르고 혼자 힘으로 보내는 교회, 선교적 교회를 세워보겠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파송 헌금이 들어왔다. 온 성도들이 정성으로 헌금하여 우리 가정을 파송해 준 것이다. 그날 밤에 재정부에서 넘겨 받은 헌금봉투를 가지고 아내와 함께 봉투에 써있는 글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그 봉투들 가운데 유난히 3개의 헌금봉투가 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자기의 이름들을 적어 넣은 주일학교 아이들의 헌금 봉투가 3개나 있었다.
“여보! 이것 좀 봐요 …… $2, $2.50, $5”
나는 수천 수만 불과 비교할 수도 없는 사랑의 빚으로 파송되어졌다. 그리고 이제 웰링턴에서 더 많은 젊은이들을 파송하기를 소망한다. 가정과 직장과 세상 곳곳으로 사랑의 빚을 끌어 안고 보냄 받은 감격을 품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파송하는 교회! 그 교회가 바로 다음세대를 위한 선교적 교회이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