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모든 민족이 주를 예배하게 하는 것

열방을 향한 관심
십 수년 전에 뉴질랜드에서 개최된 요나 선교학교에 참여한 적이 있다. 강사였던 이재환 선교사는 첫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백지를 주며 자신이 아는 나라들을 적어보라고 했다.

필자는 속으로 최소한 50 나라 이상을 적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30여 개를 적고 나자 억지로 기억을 짜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충분한 시간을 준 후 강사는 이 간단한 테스트를 한 이유를 설명할 때 <관심>이란 단어를 말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의 나라들에도 하나님의 관심이 가 있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 또한 더 많은 나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선교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땅의 나라들과 민족들에 관심을 쏟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에 이르길 원하신다고 증거한다(딤전 2:5). 예정론 등 신학적 논쟁이 어떠하든 선교에 참여하는 이들은 만민을 향해 지대한 관심을 지니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구촌 어디든 저 먼 곳에 사는 이들의 영혼 구원에까지 깊은 관심과 뜨거운 열정을 지닌 자들이 가로막는 온갖 방해요소와 많은 차이들을 극복하며 그들에게 갈 수 있다.

왜 선교를 하는가?
너무 쉬운 질문 같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분명할수록 선교에 적극성을 갖게 된다. 일차적인 답은 죄인이 회개하고 구주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도록 돕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차적이면서 궁극적인 대답은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백성이 자신들의 구주Saviour이며 주Lord이신 분을 매일 그리고 영원히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은 먼저 구원받은 사람이 자신의 예배하는 삶에서 기쁨과 환희를 맛본다면 더더욱 적극성을 띨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잠시 필자의 지난 경험담을 나눔에 양해를 구한다. 대학 초년생 시기에 C.C.C(Campus Crusade for Christ)란 선교 단체를 통해 복음을 들었다. 자취 생활비를 아끼자고 찾아간 곳이 이 단체에서 운영하는 사랑방이라는 공동 자취집이었는데 조금씩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를 키우고 있는 중이었지만 혹 이상한 단체가 아닌지 경계와 의심을 품고 있었다.

불신자 상태였던 내게 감동으로 다가온 사건들이 있었는데, 한번은 독감을 앓을 때 같이 사는 한 형제가 기도를 해 주는데 그의 눈물방울들이 내 얼굴에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소하고 당황스러운 경험이었음에도 사실 그의 기도에 진심이 느껴져 감동이 되었다.

사랑방 가족들은 이 단체에서 거의 열심당원에 속한 자들이라 때로 자의로, 때로 강한 권유를 받아 여러 행사에 끌려다녔는데 특히 대구 C.C.C. 전 회원이 모여 드리는 예배 시간은 필자에게 적지 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함박웃음으로 반겨주는 이들과 자신의 믿음을 나누는 간증, 그리고 무엇보다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다같이 찬양을 부를 때 그 현장은 믿음의 걸음마를 걷는 내게도 종종 온몸에 소름이 돋는 전율이 일어났다.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형제는 굵은 바리톤 소리로 마치 자신이 부르는 이 노래를 끝내고 죽어도 좋을 것처럼 전심전력으로 찬송을 했다. 그는 정말 매번 그랬다. 그에게서 필자는 이 찬송을 받으실 분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내가 이 찬송 받으실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케 되었을 때 동일하게 그 형제의 찬송과 예배를 나 또한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예배는 전염성이 강하다. 누군가 그 곁에서 온 맘으로 찬송하고 목숨을 다하듯 예배하면 자연스레 주변을 전염시키며 심지어 불신자까지 변화를 일으킨다.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던 사람이 어느 날 확연히 달라져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일상이 되면, 이것이 그에게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치로 자리 잡으면, 그는 더 이상 이 복을 자신의 것으로만 누리고 살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이들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참 예배자는 자신이 예배하는 하나님께서 열방과 만민이 모두 예배해야 마땅한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심을 안다는 뜻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거룩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는 구약 성경에만 850여 회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단어가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킬 때 그 뜻은 <구별됨Distinction or Separation>이며 다른 어떤 존재도 하나님과 같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레11:44-45, 출15:11). 모든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과 같으신 이가 없음을 알고 예배하며 그렇기 때문에 유일무이하신 하나님께 알맞게 예배한다.

이 사실을 아는 다윗의 선포이며 명령이다! –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 29:2). 이 진리를 아는 바울은 하나님 아닌 다른 거짓 신들을 예배하는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1)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2)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며 3) 인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에서 나게 하사 땅에 살게 하신 분이라 증거한다. 그러하기에 더 이상 사람 손으로 만든 우상들 섬기는 일을 멈추고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구약의 다윗도 신약의 바울도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기에 그들의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한 것이다.

선교는 어디로 향하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모든 민족 천하 만민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로 간다. 선지자 하박국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것임을 예언했다(합 2:14). 전도자 바울은 모든 무릎이 예수 이름 앞에 꿇고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예언했다(빌 2:10-11).

사도 요한은 훗날 이루어질 천상의 예배를 계시 가운데 묘사하였는데 그 놀라운 광경은 이렇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계 7:9-12).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로 하여금 선교를 지상 대명으로 주신 것은 모든 족속과 천하만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거룩한 자리에 참여하도록 초대장을 발부하신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특권을 누리는 이들은 이 초대장을 전달하는 일에 최선의 달음질을 해야 한다. 이 초대장은 지존하신 왕God the Most High께 올려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영과 진리로 충만할수록 더욱 그 대상들을 향한 열정과 긴급성이 담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