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네에서의 신혼 시절

신혼 시절 우리는 미아리 삼거리 산동네 꼭대기의 연립주택에 살았다. 방 두 개짜리 연탄보일러 연립주택을 세 들어 살았는데 그땐 그냥 행복하기만 했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내려갈 때는 이십 분 올라올 때는 삼십 분쯤 걸렸는데 출근하는 나를 아내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같이 내려와서 버스에 탄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냈고 퇴근할 때엔 정류장까지 미리 내려와서 기다리다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마중해서 같이 손잡고 집으로 오곤 했었다.


집에서 정류장까지의 길은 꽤나 경사가 심한 언덕길이어서 더운 여름날엔 땀을 뻘뻘 흘려야 했고 추운 겨울날 눈이라도 오면 둘이서 손을 잡고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와야 했는데도 우리들은 그냥 즐겁기만 했다.

첫애를 가진 뒤 점점 배가 불러와서 거동이 쉽지 않았지만 아내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아침저녁으로 버스 정류장까지 언덕길을 오르내렸다. 이제 힘들 테니 그만두라고 나는 극구 말렸지만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임신 중에 운동을 많이 해야 아가를 쉽게 낳는대요. 엄마를 믿고 태어날 아가를 마중해야 하잖아요. 엄마가 운동을 많이 할수록 아가가 쉽게 세상에 나오도록 마중하는 거예요,” 라고 말하는 아내의 큰 눈동자는 맑기만 했다.


퇴근 때가 가까우면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릴 아내 생각을 하고 가능하면 곧장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곤 했었다. 회사에서 좀 언짢은 일이 있었어도 돌아오는 버스 안이 만원이라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돌아와도 나를 마중하러 나온 아내가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을 참을 수가 있었다.

출산예정일이 며칠 안 남은 그날도 아내는 마중을 나왔고 손잡고 돌아온 집안에선 아내가 끓여 놓은 찌개 냄새가 구수하게 났다. 저녁 식사 후에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나는 그때 한참 유행하던 ‘추적’이라는 특집프로를 보려고 티브이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설거지 빨리하고 와요. 이거 같이 보게,” 라고 내가 말하자 아내가 “저 좀 이상해요. 배가 많이 아파요,” 했다. “왜 많이 아파? 그럼 이거 보고 빨리 병원에 가봅시다.”라고 내가 말했다. 그때까지도 아직 상황을 파악 못 한 이 철없는 예비 아빠는 태어날 아가보다 당장 눈앞에 펼쳐 치는 특집프로에 눈이 더 어두웠었다.


진통이 잠깐 멎었던지 아내도 내 옆에 앉아 같이 티브이를 보았다. 그러나 십 분도 안 돼 다시 말했다. “어, 배가 또 아파요. 이번엔 더 아파요,” 하고 말하는 아내의 얼굴에 송송 땀이 배어 나왔다. 그때서야 상황이 급해진 걸 깨달은 우린 옷을 주워 입었다. 큰 길가에 있는 ‘새한 병원’까지 걸어가기 너무 힘들 것 같아 “내가 가서 택시 잡아올까?”라고 말하자 아내는 또 그때 진통이 좀 멎었는지 “아니, 그냥 같이 걸어갈래요.” 했다. 우리 둘은 또 손을 잡고 어두운 언덕길을 걸어 내려갔다. 천만다행으로 내려가는 동안은 다시 진통이 아내를 괴롭히지 않았다.

첫 아이의 출산
병원에 도착하자 곧 입원 수속을 했고 아내는 간호사를 따라 입원실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들어가자 아내가 친정에 전화를 하라고 말했다. 나는 공중전화 있는 곳으로 가서 장인 장모님께 아내가 진통이 와서 방금 새한 병원에 입원했다고 말씀드렸다. 두 분이 곧 오신다고 하시기에 한결 마음이 놓여서 다시 입원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내가 안 보였다. 당황해서 옆 병상에 있는 분에게 여쭤보니 아내가 갑자기 진통이 심해져서 방금 간호사가 와서 데리고 갔다고 했다. 급히 분만실 있는 곳을 찾아갔더니 간호사 둘이 막 아내를 부축하고 분만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보호자 분은 밖에서 기다리셔야 돼요. 안으론 못 들어오십니다,” 라고 간호사 하나가 내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아내가 나를 보았고 그 와중에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 여기서 기다릴 게 걱정하지 마,” 라고 나도 손을 흔들며 소리치면서 나는 갑자기 울컥 목이 잠겼다. 분만실 안으로 들어가는 아내의 모습이 너무도 작아 보였다.

잠시 뒤 담당 의사처럼 보이는 이가 또 다른 간호사 하나랑 분만실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혼자서 바깥 복도를 서성거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답답하기 그지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그때 아내 혼자에게 출산의 책임을 맡겨놓은 비겁하고 무능한 남편인 것처럼 느껴졌고 분만실 안에서 혼자 있을 아내가 무척 외로우리라고 생각되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영겁처럼 느껴졌다. 매분마다 시계를 들여다보았고 분만실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별안간 분만실 쪽이 수선스러워지는 것 같더니 문이 열리고 아까 들어갔던 의사가 간호사와 같이 나왔다. 나는 뛰듯이 다가가서 물었다. “어떻게 되었지요?” 나의 물음에 의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남편이시구먼! 축하합니다. 공주님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난 공주님이든 시녀든 그건 전혀 상관없었다. “산모는요? 산모는 괜찮나요?”하고 숨이 넘어가듯 물었다. “아, 예 건강합니다. 걱정 마세요. 좀 이따 만나보세요,” 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내 곁을 지나가던 의사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 나를 쳐다보며 “근데 산모가 임신 중에 운동을 많이 했나 봐요. 초산에 이렇게 쉽게 아기를 분만한 사람은 처음 봅니다,”라고 말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아내가 내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며 했던 말이 기억났다. “엄마를 믿고 태어날 아가를 마중해야 하잖아요. 엄마가 운동을 많이 할수록 아가가 쉽게 세상에 나오도록 마중하는 거예요.”


‘그렇군요! 아내는 임신 중 내내 그 힘든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남편을 전송하고 마중하면서 또 태어날 아가를 마중했군요. 그러더니 이렇게 쉽고 편안하게 아가를 맞이했군요.’ 누군가에게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김 서방, 김 서방! 어떻게 됐나?” 그때야 도착하신 장인 장모님께서 병원 복도 저쪽 끝에서 손을 흔들며 나에게 다가오고 계셨다. 나는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며칠 뒤 아내는 건강한 모습으로 아가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아내와 아가가 편안히 잠든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시를 한 편 썼다.

마중
마중은 내려놓기입니다.

하던 일 내려놓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
내 삶의 문턱도 내려놓아
내게 오는 그분이 쉽고 편하게
내게로 오도록 만드는
마중은 내려놓기입니다.

마중은 나와의 만남입니다.

나를 만나러 오는
그분을 맞으러 나가
반가이 나를 찾는
그분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중은 나와의 만남입니다.

마중은 설레임입니다.

오는 분 기다리는 분의 마음이
이미 어디선가 서로 만나
반가운 눈빛
다정스런 미소가 되면
가슴과 가슴이 두근거리는
마중은 설레임입니다.

마중은 그래서 사랑입니다.

끝이 없는 삶의 여정
문득문득 벗어났을 때
어디서라도 나를 맞아주는
누군가가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마중은 그래서 사랑입니다.

크리스천라이프를 사랑하시는 독자 여러분!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군요. 많은 일이 있었던 올해 2024년이었지만 이렇게 살아내고 다가오는 새해 2025년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주님의 은혜입니다. 가는 2024년을 손 흔들어 곱게 보내고 오는 2025년을 손 활짝 벌려 마중하실 준비가 되어있으신지요?

제가 위에서 소개해 드린 졸시(拙詩)에서 말씀드렸듯 모든 것 훌훌 내려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마중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풍성한 사랑의 새해를 준비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2024. 12월 한국에서 석운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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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