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4박 5일의 뉴플리머스(New Plymouth) 여행이 너무도 빨리 지나간 느낌입니다. 내일 오클랜드로 돌아가려면 여섯 시간 이상 차를 운전해야 하니 일찍 자리에 들어야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결국 거실로 나왔습니다.
바닷가 숙소였기에 바다가 바로 코 앞이었지만 커다란 거실 유리문을 통해 보이는 밤의 바다는 단지 암흑이었고 끊임없이 부딪쳐오는 물결 소리만 들려왔습니다. 낮 동안의 일정이 피곤했는지 아내는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잠든 아내에게 방해가 될까 나는 불도 켜지 않고 거실의 소파에 앉아 보이지 않는 바다를 응시했습니다.
푹신한 소파가 편안했기에 그대로라도 잠이 오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잠은 오지 않고 지난 며칠 간의 행적만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산과 해변이 같이 있기에 일 년 내내 기후가 온화하고 토양이 비옥한 서해안의 항구 도시 뉴플리머스는 해변도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정원이 많아서 정원의 도시로도 불립니다.
정원의 도시 뉴플리머스
뉴플리머스 주변엔 좋은 정원이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 꼭 보아야 할 정원이 세 곳 있습니다. 도심에서 차로 불과 십여 분 걸리는 곳에 있는 와이와카이호 강(Waiwhakaiho River)을 끼고 있는 투파레 (Tupare) 정원은 입구를 지나 왼쪽 길로 들어서자마자 무리를 지어 피어있는 수국(水菊)이 가지각색의 색깔과 향기로 방문객을 맞아주는 곳입니다. 수국을 워낙 좋아하는 아내가 몇 년 전 12월 초 무심코 이곳을 들렸을 때 너무 기뻐서 어린애처럼 깡충깡충 뛰었던 곳입니다.
또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푸케이티(Pukeiti) 정원은 360헥타르의 너른 땅에 세상에서 가장 많고 다양한 철쭉과 꽃(Rhododendreon, 줄여서 Rhodo로 씀)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70년 넘게 사방에서 채집해 심어 놓은 철쭉이 열대 우림을 배경으로 만개해 있는 모습은 정말 장관입니다.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꽃이 절정을 이루기에 우리가 갔을 때는 좀 늦어서 끝물이었지만 그래도 오히려 그 애잔한 모습이 초로의 미인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그윽한 기쁨이었습니다.
홀라드(Hollard) 부부가 기증한 홀라드 정원
그리고 뉴플리머스 시내를 벗어난 카퐁가(Kaponga)에 있는 홀라드(Hollard) 정원은 결코 빠트릴 수 없는 특별한 정원입니다. 1927년에 홀라드 부부(Bernie and Rose Hollard)가 만들고 가꾼 뒤 그들 사후에 아낌없이 나라에 기증하여 모든 사람이 무료로 방문해서 즐길 수 있도록 한 특별한 곳입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들 부부의 아름다운 사연에 놀라고 정원에 들어간 뒤로는 그들이 가꾸어 놓은 엄청나게 다양한 꽃의 아름다움에 놀랍니다.
이들 부부의 아름다운 마음이 방문자 모두에게 잘 전해질 수 있도록 타라나키 시의회(市議會)는 정원 입구를 커다란 응접실로 꾸며 그곳에 커피와 끓는 물을 상비해 누구라도 거저 마실 수 있도록 마련하고 또한 겨울이나 비가 올 때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벽난로와 장작까지 비치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정원이기에 우리 부부는 뉴플리머스를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이 홀라드 정원을 방문해서 다시 한번 감격을 새롭게 하곤 합니다.
바람이 제법 부는지 거실 유리문을 통해 들리는 바다의 물결 소리가 좀 더 거세졌습니다. 밤은 더욱 깊어졌지만 아직도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상념은 더욱 또렷해지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갔습니다.
며칠 동안 휘젓고 다닌 정원들의 모습과 그 옛날 교정에 진달래 만발했던 대학교 캠퍼스 모습, 그리고 결혼 전 아내와 같이 다녔던 고궁의 뜨락 모습이 아득하게 서로 얽히면서 떠올랐습니다.
앤드루 마블(Andrew Marvell)의 정원(The garden)
이번 여정은 불과 4박5일에 불과했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여정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습니다. 지나간 세월과 그 세월과 더불어 묻혀 사라진 모든 것이 아쉽고 가슴이 아리도록 그리웠습니다. 파도 소리가 다시 유리문을 때리고 지나갔고 사위는 어둠과 정적(靜寂)으로 휩싸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온몸에 쥐가 난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몇 구절의 시(詩)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정적(靜寂)이여, 여기서 나는 그대를 찾았다.
그리고 그대의 사랑스러운 동생 순수(純粹)도!
오랫동안 잘못 생각에 나는 그대를
번잡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찾으려 했다
—————————————- 사람들과의 사귐이란 단지 조잡(粗雜)할 뿐
이 감미로운 고독에 비하면……
까마득한 옛날 학창 시절에 읽었던 앤드루 마블(Andrew Marvell)의 정원(The garden)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었습니다. 꽤나 긴 시였지만 특히 이 구절이 좋아서 몇 번씩 읽곤 했던 기억이 새로웠습니다. 다시 머릿속으로 이 구절을 음미하면서 나는 이 시가 내게 주는 교훈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소득으로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을 느끼고 그 외로움을 잊으려 혼자 있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찾아 헤매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원의 시인 앤드루 마블은 아름다운 정적과 순수를 정원에서 찾았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 정원 속에서 향유하는 감미로운 고독에 비하면 사람들과의 사귐(society)은 조잡할 뿐이라고 합니다.
여행이 끝나는 그 밤 어둠과 정적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며칠 동안 정원을 돌아다니며 나는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만을 탐했지 그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정적과 순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원은 결코 꽃과 나무가 가꾸어져 있는 곳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저곳에서 우리는 각양각색의 정원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쇼핑몰도 카페도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아름다운 정원이 될 수 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오클랜드로 올라가는 내일부터 일상으로 돌아가면 발길 닿는 모든 곳이 정원이라 생각하고 그 속에서 정적과 순수를 찾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밤바다의 물결 소리가 유리문으로 다가왔고 이번엔 그 소리가 자장가 소리로 들렸습니다. 나는 조심스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침실을 향했습니다. 가만히 침실 문을 열자 깊이 잠든 아내의 고운 숨소리가 나를 반기는 듯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