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가 한 말이다. ‘별이 빛나는 밤’과 ‘해바라기’를 비롯해 반 고흐의 세밀하고 정밀하게 그려진 걸작품들의 모든 붓질을 영상과 음향을 통해 눈으로 보고 듣고 만질 수도 있다. 반 고흐의 작품이 빛과 색, 그리고 장엄한 심포니로 연주되어 깊은 예술의 세계에 빠지게 되는 전시회가 웰링턴에서 열렸다.
고흐는 그가 살았던 1800년 후반의 풍경화와 인물화 및 정물화의 860 유화를 포함하여 2,000여 작품을 10여 년 동안 그렸다. 고흐만의 독특한 작품에는 점묘와 선, 그리고 채색이 붓질을 통해 잘 나타난다.
반 고흐의 생애와 작품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 디지털 기술과 접목하여 현대적 접근법을 사용하여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와 작품을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반 고흐의 작품은 작은 접촉에도 작품이 훼손될 수 있어 해외에서의 전시회가 어렵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는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에 반 고흐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반 고흐의 작품을 보려고 세계에서 애호가들이 찾아온다. 암스테르담까지 찾아오지는 못하지만,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반 고흐의 작품과 삶을 알리고 함께 체험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에 새로운 성격의 미술을 관객이 직접 참여하여 체험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반 고흐 해외 전시회를 위해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를 디지털을 이용하여 멀티 채널 모션 그래픽과 영화에 사용되는 서라운드 시스템으로 된 사운드, 그리고 40대의 고화질 빔프로젝트를 연결하여 새로운 멀티스크린을 호주 멜버른에 있는 Grande Exhibitions에서 제작했다.
Digital Nights Wellington – Van Gogh Alive
웰링턴 해안가의 별이 빛나는 밤에 새로운 디지털 방식으로 예술과 자연이 상호 작용하는 작품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은 8m 높이로 쌓은 컨테이너에 3,000개가 넘는 이미지를 투사하는 독창적인 전시 방법을 사용했다.
아이들이 있는 가족과 연인, 그리고 친구와 동료들이 같이 온다면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
기간: 8월 28일 -10월 30일
장소: Odlins Plaza, Wellington Waterfront
티켓: $19 (성인 1인당)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내 그림을 반드시 알게 될 거야”
빈센트 반 고흐가 남긴 말. 빈센트 빌럼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쥔터르트에서 개혁교회 테오도뤼스 반 고흐 목사와 어머니 안나 카르벤튀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반 고흐는 1년 전에 죽은 형 빈센트의 이름을 가지고 살았다. 고흐의 할아버지도 개신교 목사였다. 2년 후에 동생 테오가 태어났다. 테오와는 평생 동반자가 됐다. 고흐에게는 형제와 자매가 더 있다.
그는 개신교의 한 기숙학교를 보내져 신학과 문학에 심취했고 외국어도 잘 했다. 튈뷔르흐 빌럼 2세 중학교에서 호이스만스 미술교사에게 미술 수업을 받았다. 그는 중학교에 다니다가 자퇴했다.
반 고흐는 16살에 센트 큰아버지의 소개로 헤이그 구필 화랑에서 일했다. 런던 지점에서 파견되어 일하게 된 고흐는 노동장의 삶을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고, 하숙집 딸 외제니 로예에게도 실연당했다.
빈센트는 화랑 일을 그만두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보조 목사가 되어 순회 설교자가 됐다. 반 고흐는 가족력인 정신적 증세가 나타났다. 다시 가족으로 돌아온 그는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이모부인 스트리케르 목사의 도움을 목사 국가고시를 준비하면서 이모부의 딸 보스에게 연민을 느끼다가 정신적인 증세로 인해 목사 고시를 중단했다.
고흐는 벨기에 선교단체에 들어갔다. 그는 탄광인 보리니지주에서 무급 조수로 일했다. 광부에게 헌신하던 고흐였지만, 그의 정신 상태로 인해 해고당했다. 반 고흐는 27살에 전도 사역을 계속 하고 싶어하면서도 탄광 노동자의 삶을 그림으로 그려보려고 브뤼셀로 떠났다.
전도 사역에서 미술 공부하러 떠나
그림 공부를 하러 브뤼셀로 간 반 고흐는 미술학교보다는 혼자 그림을 그렸다. 외사촌 안톤 모베에게 잠시 그림 공부를 했지만 고흐의 성격 탓에 오래가지는 못했다. 고흐는 딸이 있고 임신 중인 매춘부 시엔이라 부르는 여자와 동거를 했다. 가족과 주위의 반대와 매춘부로 살려는 시엔과의 관계가 어그러져 결국 그녀와 헤어졌다.
고흐는 니안스테르담에 가서 혼자서 그림을 그리다가 가족이 있는 뇌넨의 목사관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때 베흐만과 연애 하는데 그녀가 자살을 시도하여 발작을 일으켰다. 반 고흐는 다시 아인트호벤으로 갔다.
이곳에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 먹었다.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사망하자 잠시 그림을 그리지 않다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가운데 매춘부와 이름이 같은 시엔이 임신하는 바람에 반 고흐는 오해를 받았다.
반 고흐는 파리에서 일본의 도자기 포장지에 그려진 우키요의 ‘비오는 날의 다리’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 아를로 가서 그림을 그렸다. 이곳에서 반 고흐는 폴 고갱과 공동생활을 했다. 두 사람은 곧 성격과 그림에 관한 이해 차이로 갈등했다.
고흐는 정신 발작으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 이를 계기로 아를 시립병원에 입원했다. 고흐는 그림을 그리면서 생레미 생폴 요양원으로 옮겼다.
생레미에서 고흐는 그림을 그렸다. 처음으로 ‘아를의 붉은 포도밭’ 그림이 팔렸다. 빈센트는 발작과 정신적인 증세가 주기적으로 나타나 정신적인 부담을 가졌다. 그동안 동생 테오의 조언과 경제적인 후원으로 살던 고흐는 생레미 요양원을 퇴원하면서 파리 근교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갔다.
자연 풍광과 밀밭이 펼쳐진 작고 전원적인 오베르에서 정신과 의사인 가셰박사를 만난 고흐는 치료에 기대를 했지만, 진전은 없었다. 고흐는 가셰 초상화를 그렸다. 가셰도 고흐의 작품을 인정해주었다.
빈센트는 발작 증세와 건강 악화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않고 숙소로 돌아왔다. 테오가 다음날 고흐에게 찾아왔다. 반 고흐는 1890년 총상에 의한 감염으로 죽었다. 테오는 고흐의 전시회를 열었지만,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흐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테오도 정신 질환이 생겨 반년 후에 고흐 옆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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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주요 작품
감자를 먹는 사람들
아를의 침실
밤의 카페 테라스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아이리스
오베르의 교회
까마귀가 나는 밀밭
반 고흐 그림 보존하고 책으로 알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은 테오가 보관했으며 테오가 죽자 테오의 아내 요한나 반 고흐가 고흐와 테오가 주고 받은 826 통의 편지를 20여년 간 정리하여 서간집으로 묶어 출간했다. 또한, 고흐 사후에 요한나의 헌신으로 빈센트 반 고흐 전시회가 열리면서 조금씩 세상에 알려졌다.
테오의 아들 반 고흐 주니어는 700여 점의 고흐 작품을 네덜란드 정부에 기증했다. 암스테르담에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을 열어 독특한 점과 선, 그리고 색이 그림에 어우러지는 빈센트 반 고흐만의 화풍을 선보였다.
2017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유화로 그린 애니메이션 영화 <러빙 빈센트>가 개봉되어 다시 한번 빈센트 반 고흐의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