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사진전 및 기념 세미나

감동과 은혜로 재 발견한 역사의 현장

뜨거운 예수의 심장을 갖고 유럽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종교개혁자들의 흔적과 그 현장을 사진에 담아와 사진전을 위해서 다시 꺼내 보는 것은 그 감동과 깊이가 배가 된다는 것을 이번에 새롭게 깨달았다.

그 은혜와 감동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향점을 향해서 가고 있는 모든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자 지난 11월3일부터 5일까지 구세군 오클랜드 한인교회에서 사진 전시회의 시간을 가졌다.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종교개혁의 현장에서 복음의 진리를 바로 세우고 참된 교회를 이루고자 몸부림쳤던 그들의 고뇌의 소리가 들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던 그들의 열정이 보이고, 그리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 타협함 없이“아니오!” 라고 외쳤던 그들의 용기를 확인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현장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더 담아 오려고 카메라 셔터를 일만 번 이상 눌러 대는 것도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 중에서 150장을 골라내서 나라와 인물별로 설명과 함께 작업하는 일은 더 힘든 일이었다.

이 사진들은 단지 견문을 넓혀주는 차원을 넘어 역사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바로 세우고자 자신의 생명을 걸고 헌신했던 선배들을 만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걸었던 길을 함께 걷고자 하는 결단을 갖게 해줄 것이다.

약속했던 전시기간은 끝났지만 이 사진들은 그런 바램을 간직한 채 얼마동안 더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여러분들을 기다릴 것이다.

끝으로 이번 사진전을 위해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수고하고 애쓴 손길들이 있었기에 이번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을 위해서 나라마다, 시대마다 일꾼들을 준비 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셨던 것처럼……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세미나
사진과 함께 뒤돌아보는 종교개혁의 발자취
중세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유럽 곳곳을 순례하면서 그 역사의 현장에서 느낀 것은, 그 당시 그들의 삶은 불안으로 점철 되어 있었다.

유럽 대륙은 수 백 년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했고, 공포의 질병이었던 흑사병의 창궐, 오스만투르크에 의한 동 로마제국 멸망과 이슬람 침공에 대한 불안함, 그리고 교황의 아비뇽 유수와 분열로 인한 영적 공황상태, 로마가톨릭은 성경으로부터 괴리되어 복음의 본질과 거리가 멀어서 이런 불안함과 영적 필요를 채워줄 수 없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 회복이어야만 했다.

마틴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붙이기 전, 프랑스 리옹 출신 피터 왈도는 1170년부터 4복음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실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과 구별되는 그를 추종했다.

그러자 리옹의 빈자들(왈도파)이라고 불린 이들은 카톨릭에게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또 1382년 영어 성경을 완간한 영국의 위클리프는 사후 그의 개혁정신을 두려워한 로마카톨릭에 의해 부관참시 당했다.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얀 후스 역시 자국어로 성경 번역에 공을 들이며 로마카톨릭 비판과 교회개혁을 주창하다가 화형 당했다.

후스는 교회론에서 성경 말씀대로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죄사함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고, 교황을 비롯해 누구도 성경에 어긋나는 교리를 선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루터는 성경만이 무오하고 최종적인 권위가 있기에 성경을 바탕으로 오직 믿음의 이신칭의 교리를 세웠으며, 만인제사장론을 통해 로마카톨릭의 사제주의를 붕괴시켰고, 무엇보다 루터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설교로 강론하면서 사람들의 변화를 일으켰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 발명된 금속활자를 통해 진리를 문서로 배포함으로 루터를 종교개혁의 시초로 여기게 했다.

연대를 통해 확산된 종교개혁
루터 이전에도 성경을 중심에 둔 중요한 교회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위클리프는 추종자들이 많았지만그 영향력이 영국 내에 한정됐다.

후스 역시 자국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홀로 개혁의 깃발을 들어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루터는 혼자가 아니었다. 루터의 동료이자 함께 독일의 종교개혁을 일군 필립 멜랑히톤(1497~1560)을 비롯해 안드레아스 폰 칼슈타트 등과 함께 했다.

루터와 동시대에 유럽 각 지역에서 탄생한 종교개혁자들은 루터보다 1년 앞선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요한 오이콜람파디우스가 1482년 태어났고, 루터(1483)에 이어 츠빙글리(1494), 기욤 파렐(1489), 마틴 부쳐(1491), 윌리엄 틴델(1494), 하인리히 불링거(1504), 그리고 존 칼빈이 1509년에 탄생했다.

오늘날 장로교회를 태동시킨 존 낙스(1514)와 칼빈의 후계자 베오도르 베자(1519)까지, 유럽 전역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핵심 인물들이 불과 한 세대 동안 탄생했다.

종교개혁의 샛별로 불리는 위클리프 이후 200년이 지나지 않아, 루터의 95개조 논제 이후 20년 만에 교회의 개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후 루터를 중심으로 한 개혁교회는 독일을 비롯해 스웨덴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등 북유럽 지역에서 자리를 잡았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발발한 칼빈의 영향은 프랑스 개혁자들을 지원하면서 바다를 건너 스코틀랜드에서 꽃을 피웠다.

칼빈 버금가는 종교개혁자 존 낙스
1553년 제네바에서 칼빈을 만난 존 낙스는 1559년 개혁교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여느 종교개혁자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교회개혁을 추진할 때, 낙스는 스코틀랜드 국가 전체를 성경 위에 세웠다. 바로 이 점이 그의 위대한 점이었다.

낙스는 가장 타락한 시대에 생생한 목소리로 무지한 자를 일깨우고, 슬픔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교만한 자를 책망 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설교사역 하나로 스코틀랜드를 개신교 국가로, 그것도 최초의 장로교의 나라를 세웠다.

다른 개혁자들에 비해 낙스만이 유일하게 한 나라 전체를 개혁시킨 인물이다. 그래서 다른 개혁가들은 로마카톨릭의 가지치기를 했다면, 낙스는 로마카톨릭의 뿌리를 내리친 개혁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새 시대의 지평을 눈부시게 열어 놓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낙스의 활동과 업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남긴 작품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설교 전문도 1편 뿐이고, 전집도 고작 6권으로 편찬됐다.

낙스는 자신이 책을 쓰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를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 것처럼 그는 설교를 통해서 당시 로마카톨릭의 교권과 왕권의 강압에 맞서 담대하게 성경의 진리를 선포했다. 그는 행동하는 개혁가였으며, 쉬지 않고 순회사역을 감당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설교를 했다.

행동하는 개혁가였기에 낙스는 저서를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낙스의 설교 한 편은 500명의 나팔수가 동시에 나팔을 불어서 잠을 깨우는 것보다 더 많은 영혼들을 사망의 잠에서 깨웠다고 했다. 그에게 진리의 나팔수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오늘 이 땅에도 낙스와 같은 진리의 나팔소리가 휘몰아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