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시선’

“우르릉 쾅! 와장창 탕탕!

벼락 치는 소리와 기물 넘어지는 소리가 한바탕 쏟아지고, 선원들의 괴성과 객실의 절규가 이어진다. 흔들리는 바다. 지금 서 있는 것인지 누워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내 몸은 좌우로 크게 출렁거린다.

살아남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나는 그저 누워만 있다. 이 폭풍의 근원을 알기 때문일까? 선실 밖 분위기와는 다르게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불안하지가 않다.

그렇게 누워만 있은 지 수일 째, 누가 보면 맘 편히 잠이나 자는 인간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싶지만 내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정작 나는 오지 않는 잠을 하염없이 청하고 있었던 것을.

폭풍은 두렵지 않은데 잠은 또 못 이루고 있고, 게다가 잠은 못 이루는데 잠들려 안간힘을 쓰고 있고, 도대체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외면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걸까?

사실은 폭풍이 오기 전부터, 아니 이 배를 타기 훨씬 전부터 나는 이미 더 험한 폭풍의 한 가운데 있었다. ‘불순종’이라는 폭풍의 한 가운데에.

‘니느웨(Nineveh)로 가라! (요나 1:2)’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 늘 그렇듯 급작스럽고 느닷없이. 동시에 고요하고 평안하게… 하지만 나는 갈 수가 없었다. 아니 가기가 싫었다. 우리 민족을 핍박한 앗수르(Assyria) 놈들. 교활하고 힘만 센,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같으니.

게다가 니느웨는 놈들이 자랑하는 가장 크고 화려한 도시가 아닌가? 그만큼 거만하고 재수 없는 도시다. 그대로 불타버려도 아쉬울 것 하나 없다.

그리고 난 그분을 안다. 여호와 그 분의 음성은 심판과 저주를 즐기는 무서운 재판관의 음성이 아니라, 기쁘게 용서하고 오히려 먼저 용서해주고 싶어서 애가 타는 부모의 간청이다. 그래서 더 가기가 싫은 것이다. 그 하늘 같은 사랑은 우리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특권인데 버러지 같은 니느웨 놈들까지 누리게 된다니…… 내 차마 그 꼴은 볼 수가 없다.

도망쳤다. 니느웨의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있을까? 정말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 나는 그 얼굴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도망치는 것이다. 싫은 걸 어쩌겠는가? 정말 싫은 것을. 어쩌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이런 속 좁은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순종은 결국 나 자신을 더 고단하게 만들 뿐이다. 도망치려 하면 할수록 나만 지친다. 게다가 저 선원들은 또 무슨 잘못인가? 자신의 신들을 부르짖으며 아비규환에 빠진 저들. 내가 저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었구나.

이제 그만 끝내야겠다. 이 고단한 씨름을. 내 생각, 내 바램, 내 기호 다 내려놓자. 주님 제가 이제 항복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요나 1:12).”

요나에게는‘고집불통’이라는 일종의 불명예가 꼬리표처럼 붙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신의 사명을 맡기신다. 더구나 니느웨 같은 험지(險地/harm’s way)에 복음을 전하는 일로 부르시는데 아무에게나 그런 사명을 맡기시겠는가? 부족한 점은 분명 있었겠지만, 요나는 하나님께서 뭔가를 맡길 만한 나름‘괜찮은’ 선지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지자도 하나님과 시선이 완벽히 맞을 순 없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감히(?) 충돌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요나서의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지점은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충돌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아내와 6년째 결혼 생활 중이다. 짧으면 짧을 수도 길면 길 수도 있는 6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 가장 가까운 생활권 내에서 거의 24시간을 함께 붙어있었다(모든 프리랜서 부부들이 그렇듯).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내와 나 사이에는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느끼고 해석하는, 이른바 ‘시각 차’가 크게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전보다 줄어들고는 있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삼십여 년의 세월이 있는 만큼, 앞으로도 그 이상의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그 시각 차는 좁혀지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우리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주변에 평생을 함께 보내신 노부부들도 여전히 시각 차가 크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이제는 그 시각 차를 좁히는 일도 귀찮으신 듯 그냥 다름을 인정하며 살아가신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솔루션 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시각 차를 좁히고 시선을 맞춘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곳을 바라보는 행위만을 의미하진 않는 것 같다. 시선을 맞춘다는 것은 서로 간 마음의 방향을 맞춘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한마음’이 된다는 의미일 테니……

여전히 부족한 나는 하나님과 끊임없이‘튜닝 중(Tuning)’이다. 아직도 내 시선에는 요나가 미워했던‘니느웨 놈들’ 같은 인간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그들과 하등 다르지 않음을 그 분은 가르치신다. 모두가 자녀임을 일깨워 주신다.

그러니 나는 평생을 쉬지 않고 그 시선을 맞춰 보고자 한다. 마음과 마음이 합해질 때까지.
죽기 전까지 이룰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평생 지고 갈 수밖에.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 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요나 4:11).”

이전 기사1.5세대의 고민: Super Christian?
다음 기사“무증상자 정말 무섭더라”
석용욱
단국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업. 기독교 출판작가, 예술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커피’와‘예수님’으로 기독교적 사색을 담은 글을 연재하고 있다. 글쓰기를 배운 적도, 신학 학위를 받은 적도 없는데 12년 째 신앙서적 내고 있는 이상한 평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