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주는 의미요?

핸드폰을 켰다. 교회 청년 자매의 카톡이다. “지금 응급차가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사다리에서 떨어지셨어요.” “너무 걱정이 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내와 함께, “주님, 도와 주세요!” 기도하며 응급실로 달려갔다.

죽음은 의외로 가까이 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돌보던 한 장애인의 이야기다. 건강하던 아들이 갑자기 쓰러졌다. 의사의 진단이 나왔다. 조금씩 몸의 근육이 사라지는 희귀병이다. 그것도 급성이다. 몇 개월 전만해도 그는 직장을 다녔다. 이제 삼십 대 후반, 마흔도 안 되었는데. 다리 근육이 사라지면서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심장의 근육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그래도 감사하다고 한다. 그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었다. 죽을 고비를 벌써 몇 번을 넘겼다고. 지금 아들이 이렇게 살아있으니 감사하다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고. 우연일까? 그의 이름이, 나의 영어 이름과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 장애인의 어머니는 나에게 자기 아들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삼 개월 후에 심장 근육이 멈췄고,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호스피스 관점에서 보는 죽음
호스피스는 원래 기독교의 죽음관으로부터 출발한 활동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렇기에, 성경은 죽음이 비정상적이고, 비자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인간의 마지막 적이다.

전세계가 코로나 19의 두려움에 떨고 있다. 사람들이 죽어 간다. 죽음의 두려움이 경제활동조차 얼어붙게 하고 있다.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은 다양할지라도, 대체적으로 겪는 5단계가 있다. ‘Kubler Ross’는 말기환자들을 면담하면서 의학적으로 가망이 없음을 통고 받은 환자가 죽음을 수용하고 준비하는 과정(Dying process)을 설명한다.

1단계 부정이다 갑작스런 충격에 대한 일종의 완충장치로 작용하며 현실, 죽음에 대한 고통을 덜 느끼게 됨으로 충분한 시간을 주고 기다리는 것이 요구된다.

2단계 분노이다 공격적인 분노의 화살을 타인이나 주위에 돌리는 단계로 인내심을 갖고 들어주며, 수용적인 태도로 대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3단계 협상이다 죽음을 미루고 싶어 신과 타협하는 단계로 환자를 피하지 말고 신중하게 대하여야 한다. 환자의 미성숙한 행동일지라도 성급한 판단을 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4단계 우울이다 상실감, 불안, 슬픔의 단계이다. 이 시기에는 지나친 간섭으로 죽음을 수용하려는 잠정적 준비상태를 방해하지 않도록 회상과 격려, 용기와 지지가 요구된다.

5단계 수용이다 죽음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평온, 소망 중에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로 환자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과 함께 있도록 해주며,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였음을 알도록 한다.

죽음은 사회적, 정신적, 생물학적, 생리적 죽음의 4가지 측면에서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바람직한 죽음은 4가지 측면이 골고루 순차적으로 일어나서 마지막 호흡을 멈추는 것이다.

죽음은 모든 사람 앞에 두꺼운 장벽으로 서 있다. 아무도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없다. 죽음 앞에 인간은 무력하다. 모든 체험, 업적, 성취, 실수 그리고 그 사람의 존재마저 죽음과 함께 종결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분명하다. 생물학적 인간의 죽음은 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오는 것이다.
성경은 죽음을 두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는, 육체적 죽음이다. 둘째는, 두 번째 죽음 혹은 영원한 죽음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4절,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Then death and Hades were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The lake of fire is the second death.”)

육체적인 죽음은 영과 육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고,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적인 분리를 말한다. 몸으로부터 영혼의 분리는 첫 번째 육체적인 죽음을 가져 온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적인 분리 표시였다.

그렇기에 죽음은 마지막 대적, 원수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6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The last enemy to be destroyed is death.”)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비록 죽는 불유쾌감은 남아있을지라도 사라졌다. 죽음은 예수님과의 만남, 그 약속에 속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1절과 23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죽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죽었을 때 믿는 사람의 영혼은 완전히 거룩하게 만들어지고, 하늘나라의 예배하는 삶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롭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육체가 변화되고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전해질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2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in a flash, in the twinkling of an eye, at the last trumpet. For the trumpet will sound, the dead will be raised imperishable, and we will be changed.”). 죽음은 이미 정복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의 쏘는 것을 제거하셨다. 우리는 더 이상 죽지 않는 새로운 몸을 받게 되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순종으로 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은 없다. 잠시 실패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최종적인 승리를 이미 얻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증거하셨다.

자살은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다. 안락사는 중단 되어야 한다. 로마서 8장 30절,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And those he predestined, he also called; those he called, he also justified; those he justified, he also glorified.”)

그 날이 온다. 인내하며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거둘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자매의 아버지는 오른쪽 다리뼈가 3군데나 부려졌다. 그런데 놀랍게 고백한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렇게 다쳤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셨다고. 그래서 살아 있다고. 그래서 한 번이라도 더 예배 드리겠다고. 고통도, 죽음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는 없다. 그래서 살아 숨쉬는 동안 우리는 그 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