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셋째 주 찬송/3월 넷째 주 찬송

3월 셋째 주 찬송/290장(통일412)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주님의 기도를 더 계속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단 외마디 “잘못 했어요”란 말만 들었어도 그들을 용서하려 했습니다. 이 명분이야말로 지금껏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나의 리더십이었고, 날 지켜준 권위였지요.

그런데… 그런데… “그래. 너는 꼭 그 말을 들어야만 되겠니? 명분이 뭐 대단한 것이라고.” 전에도 주님은 상처 입은 모습을 보이시며 이 비슷한 동문서답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딴엔 마지막까지 움켜쥔 자존심인데 그것마저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아, 이번에도 또 그 묘방(妙方)이시군요.”

주님의 마음이 슬며시 내 마음에 자리 잡은 듯, 어느새 용서의 마음이 일기 시작하더니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반전(反轉)도 그런 반전이 있을까요. 충만한 기쁨의 순간, 이건 또 뭡니까. 이젠 도리어 내가 용서를 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속히 단원들께 달려갈 설레는 마음으로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데 왜 그리도 아침이 더딘지요. “선생님, 잘못했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밤을 샌 듯 창문 밖으로 단원들이 보였습니다. 그 아침, 우린 모두 울었습니다. 서로 용서하는 기쁨에 겨워.

찬송 시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는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의 클러프(Samuel O’malley Clough, 1837-1910)목사가 1860년에 지었습니다. 원래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55;17)라는 말씀을 기초로 6절의 찬송시를 썼는데, 우리 찬송엔 눅 22;32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전도자 무디(D. L. Moody)와 그의 음악 동역자인 생키(Ira David Sankey, 1840-1908)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전도 집회를 인도하는 도중 우연히 낱장으로 인쇄된 이 시를 얻게 되었답니다.

생키는 이 시를 읽고 또 읽고 묵상하다가 큰 감동을 받아 곡명 INTERCESSION(중재)을 작곡하게 되었는데, 이 곡은 남은 집회동안 매일 불러 이를 계기로 전 영국 내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찬송은 미국에서 출간한 ‘복음찬송과 성가집’(Gospel Hymns and Sacred Songs)에 수록하였는데, 1875년은 이 책의 출판년도입니다.

찬송 시엔 시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행법(平行法)이 눈에 띠는데, 그 예로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내 주 예수/ 날/ 여전히/ 부르사” 등입니다.

후렴에서 “주 널 위해 비네”(For you I am praying)의 세 번에 걸친 모방 패시지는 울음 섞인 간절함으로 보이고, “주 널”을 원시(原詩)에서 ‘For you’, ‘For you’하며 재차 강조함이 노래하는 우리 심령을 쪼개는 듯합니다.

3월 넷째 주 찬송/147장 (통일 469) 거기 너 있었는가?

아메리카 흑인영가(Afro-American Spiritual)인 “거기 너 있었는가?”는 제목에서부터 우리를 그 옛날 주님께서 처형당하셨던 십자가 형장으로 이끕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준엄한 목소리. “거기 너 있었는가?”

“예, 내가 거기 있었습니다. 나는 그분께서 고난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둡고 침침한 감방 속에서 쇠사슬에 매여 죽을 날을 기다리던 나 바라바가 풀려나와 눈부신 태양을 보던 날, 나대신 죽는 사람이 있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중략)아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나는 떨려옵니다.”

허밍을 배경으로 굵고 투박한 음성으로 들리는 바라바의 고백. 내가 미션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던 청년시절, 교목으로 계셨던 유경재 목사님을 도와 ‘찬송으로 드리는 음악예배’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바리톤과 합창을 위한 ‘거기 너 있었는가?’ 중 낭독부분인데, 이 작품은 출판되어 지금도 여러 곳에서 연주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의 음악엔 우리네의 한(恨)같은 것이 배어있습니다. 우리네가 흥(興)으로 풀어내듯이 혼(魂)으로 녹여낸다고나 할까요. 지상에서의 고된 삶은 언제나 주님의 고난당하심으로 위로받으며, 오직 죽음 저편에나 기다릴 천상의 자유로움만을 소망하며 노래합니다. 그들은 이 영가를 부르며 주님께서 달리신 ‘십자가’(1절)와 ‘나무’(2절)를 그들이 고문(拷問)당했던 기구를 연상했을지 모릅니다.

‘무덤’(4절) 역시 황야에 버려질 그들의 묘지를 생각했겠지요. 이 찬송은 1899년 보스턴에서 출판된 찬송집(Old Plantation Hymns)에 처음 실린 이래 고난 찬송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성금요일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일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이날이 되면 성도들이 모여 복음서기자들이 기록한 주님의 수난에 관한 서술적 기사를 읽으며 주님을 추도(追悼)하였습니다(Gospel Recitation, A.D.300-1100).

복음서 기자(evangelist)와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 제자, 총독, 대제사장 같은 조연들과 회중들이 참여하는 군중 등으로 배역을 나누어 대화체로 읽곤 하였는데, 이는 종교적 교육수단으로 삼아왔지요. 이러한 전통은 서양의 연극을 낳았고, 수난극(受難劇)과 오라토리오, 수난곡 같은 극음악(劇音樂)의 유력한 근원이다.

교회음악사에서 수난곡은 찬트수난곡(Plain Passion, 12C), 다성수난곡(多聲受難曲, Polyphony Passion, 16C), 오라토리오 수난곡(Oratorio Passion, 17C), 코랄 수난곡(Chorale Passion, 18C) 등으로 발전되어왔습니다.

J.S.바흐의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베토벤의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쉿츠(H.Schütz)나 하이든의 ‘십자가상의 7언’, 스테이너(J.Stainer)의 ‘십자가상의 죽음’(The Crucifixion) 등은 성금요일마다 세계 곳곳에서 연주되는 걸작입니다.

아쉽게도 교회사적 문화유산인 성금요일 수난곡 연주관습은 우리 한국교회에선 거의 사라졌습니다. 나는 이번 성금요일, 남대문교회에서 드보아(TH. Dubois)의 ‘십자가상의 7언’을 연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