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구원은 손해 보는 장사이다

친한 까페 사장님이 골똘히 고민에 빠져있다. 커피 트럭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까페 안에만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고객을 찾아 진취적으로 나가고 싶은데 투자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트럭을 중고로 구입한다 쳐도 다른 장비 비용은 어찌 할지…그에 반해 막상 나가면 커피를 몇 잔이나 팔 수 있을까? 투자에 비해 수익을 얻을 수 있을까? 결국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커피 트럭을 포기했다. 당연한 결론이었다. 지금은 ‘자본주의 시대’ 아닌가? 자본이 최우선 기준인 시대.

영혼구원은 손해 보는 장사이다.
경제적 관점으로만 봤을 때 그렇다. ‘고 투자’ ‘저 수익’ 사업인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많이 투자하고 적게 수익을 얻는, 혹은 수익이 아예 없는 일을 하려고 하면 무슨 말을 들을까? 뻔하다. 욕먹을 것이다. 미련하다고…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손해 보는 장사를 자꾸하라고 명하신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뺏으려는 자에게 겉옷도 내어주고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란다. 그 중에 가장 크게 손해 보는 장사가 하나 있는데 바로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간다는 말씀이다. 멀쩡한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제 발로 나간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간다니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자본주의 시대에 예수님이 바리스타로 오셨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큰 돈 들여 중고 트럭을 하나 구입한 후 개조하여 몰고 나가셨을 것이다.

한 잔의 커피가 필요한 한 영혼을 찾아서. 그리고는 결국 만나야 할 한 영혼을 만나 커피를 내려주신 후 흐뭇하게 돌아오지 않으셨을까? ’오늘도 천하를 얻었어!(마 16:26)’ 라고 되뇌며…

4번째 책을 출간했을 때 판매율이 가장 저조했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쓰고, 그리고, 가장 많은 제작비를 투자해 출간한 책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 실망이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 작가 생활접어야 하는 게 아닌가?’ 출판사 볼 면이 없어 한참을 쥐구멍을 찾고 헤매고 있을 무렵, 한 통의 편지가 출판사로 날아왔다. 일종의 ‘팬레터’였다.

‘석용욱 작가님께’ 라고 시작된 글은 무려 일곱 장이나 손 글로 적혀있었는데 내용인즉, ‘내가 당신 책을 읽고 하나님을 믿기로 했다. 하나님을 소개해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다.(일곱 장 속에 적혀있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다 적을 수 없음을 아쉽게 생각하며)

편지에 감동을 받은 나는 보낸 이가 궁금해 끝 부분에서 보낸 이의 이름을 찾았지만 보낸이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다. 이름대신 몇 자리 숫자로 자신을 소개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봉투에 적혀 있는 주소지는 대전의 한 형무소.
순간 깨달았다. ‘이 한 사람을 위해 이번 책을 쓴 것이었구나…’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꽤 많았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고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선교’라는 이름 하에 고 투자 저 수익 사업을 하며 돌아다닐 때가 많았다. 대부분이 한 영혼을 상대하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 여정 속에서도 내 안의 ‘경제적.계산적 사고’는 늘 그대로였다. 매번 본능처럼 계산기를 두들기곤 했다. 결국 이 시대에서 ‘나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 때문에 보는 ‘금전적 손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오늘도 십자가를 묵상한다. 가장 미련하게 가장 큰 손해를 감수하신 예수님의 발걸음을.
그 앞에서 내가 보는 금전적 손해는 감수 할 만한 정도의 수준이다.
물론 오로지 경제적 관점하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