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레크 쇼팽 ‘피아노의 시인’

피아노의 시인(詩人)으로 불리는 쇼팽에게도 첫사랑이 있었습니다. 바르샤바 음악원에 다니던 쇼팽은 같은 학교에 다니며 성악을 전공하는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라는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소심한 쇼팽은 말 한마디 제대로 붙여보지도 못하고 속으로 애만 태웠습니다. 그가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호프스키에 보낸 편지를 보면 ‘그녀를 처음 본 지 6개월이 지났는데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있네. 대신 협주곡 F단조의 느린 악장을 작곡하면서 그녀를 떠올리지’라고 써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열 아홉이었습니다.

음악으로 승화한 첫사랑
열 아홉 쇼팽이 처음으로 여인에게 느꼈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 애틋하고 아름다운 감정은 음악으로 승화하여 낭만주의 시대에 찬란히 빛나는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이 탄생하였습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E 단조와 2번 F 단조입니다. 이 두 협주곡의 느린 악장, 1번의 로망스와 2번의 라르게토를 들어보면 첫사랑 콘스타치아를 향한 감미롭고 서정적인 아름다운 선율이 듣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만듭니다.

2번 협주곡 F 단조가 그의 나이 19살 때 먼저 작곡되었고 1번 E 단조 협주곡은 1년 뒤 그의 나이 20살 때 작곡되었지만 출판이 먼저 되었기에 번호가 서로 뒤바뀌었습니다.

이 두 개의 협주곡은 그가 평생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의 전부 다입니다. 첫사랑 여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없었다면 아마도 태어나지 못했을 너무도 귀중한 두 개의 협주곡입니다.

쇼팽의 짧은 삶, 시작은 없이 슬픈 끝만 있는 하나의 삽화
음악을 듣기 전에 먼저 쇼팽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나의 인생, 그것은 시작은 없이 슬픈 끝만 있는 하나의 삽화이다,’라고 스스로 탄식하리만치 애절하고 파란 많은 39년의 짧은 삶을 살았던 쇼팽은 폴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프랑스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폴란드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의 음악적 재능은 모차르트에 비견될 정도였으며 그 재능을 발휘하여 7세에 작곡을 했고 8세에는 공개 공연을 했습니다.

그의 천재를 알아본 바르샤바의 귀족들의 관심을 끌어 자선공연도 하였습니다. 6살 때인 1816년에 첫 피아노 레슨을 당시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보이치에흐 지브니에게 받았으나 1822년 12살이 되었을 때엔 스승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그만두었습니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830년 11월에는 보다 큰 음악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바르샤바를 떠나 유럽을 향합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10월에 고별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이 연주회에서 그는 여행 떠나기 얼마 전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초연으로 연주했고 첫사랑 콘스탄치아는 찬조 출연하여 독창을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쇼팽의 사랑을 눈치채지 못했고 쇼팽은 죽을 때까지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기에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쇼팽이 죽은 뒤 모리츠 카라소프스키라는 분이 쓴 쇼팽의 전기를 읽은 뒤 비로소 콘스탄치아는 쇼팽의 진심을 알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 연주회는 그녀를 향한 쇼팽의 플라토닉 러브의 종지부가 되었고 쇼팽에게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조국에 대한 고별 연주회가 되었습니다.

고국의 흙과 같이 고국을 떠나다
어디에 가든지 폴란드를 잊지 말라는 당부와 더불어 친구들이 준 은잔(銀盞)에 폴란드의 흙을 가득 담아 넣고 쇼팽은 드디어 바르샤바를 떠났습니다. 맨 먼저 간 곳은 그 전에 가서 대단히 환영을 받았던 빈이었지만 전과는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모든 것이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얼마 안 돼서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나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러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더욱 노력한 결과 폴란드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1831년에 쇼팽은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19세기 초반의 파리는 낭만주의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과 만났습니다.

음악가로는 리스트, 베를리오즈, 로시니 등이 있었고 문인으로는 위고, 발자크, 그리고 나중에 연인이 되는 조르쥬 상드가 있었습니다. 특히 화가 드라크루아와 시인 하이네와는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쇼팽은 사상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들 예술가들과 지식인들과의 교류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자극을 받았습니다.

마음도 육신도 연약한 그는 39년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주옥보다 영롱한 음악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200곡에 달하는 작품 대부분은 피아노곡입니다. 낭만주의 작곡가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쇼팽의 작품은 모두가 그 중심에 피아노가 있습니다.

그의 악상은 검고 흰 건반 위에서 이루어졌고 그 건반 위에서 그의 음악적 우주가 창조되었습니다. 작곡가이자 평론가였던 슈만이 ‘신사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천재가 나타났습니다,’라고 쇼팽에게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은 결코 호들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 F 단조
쇼팽의 수많은 피아노 작품 중에 협주곡은 단 두 곡뿐입니다. 그가 19살 나이에 썼던 사실상의 첫 번 협주곡인 이 곡은 앳된 청년 쇼팽이 말도 못 붙여보고 가슴앓이했던 첫사랑 콘스탄치아에 대한 연민과 정열 그리고 고뇌가 담겨있는 작품입니다.

풋풋한 청년의 감성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협주곡은 관현악 부분에서는 어딘지 완성되지 못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은 다른 어느 작곡가의 협주곡보다 뛰어납니다.

특히 2악장 라르게토(Larghetto)는 쇼팽이 고백했듯이 말못 하는 첫사랑의 애절한 마음이 건반 하나하나에 그대로 옮겨져 있는 순정이 가득한 곡입니다.

명곡이니만큼 좋은 연주가 많습니다마는 우리는 Martha Argerich의 피아노 독주와 Mstislav Rostrovich가 지휘하는 National Symphony Orchestra의 연주로 들었습니다. 아르게리치의 피아노 연주는 쇼팽 음악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드러냅니다.

음악 감상이 끝난 뒤 살펴본 하나님 말씀은 요한 1서 4장 7절에서 9절입니다

  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2.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3.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남녀 간의 사랑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또한 궁극적으로 우리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우리는 서로를 살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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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서울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 사업을 하다가 1985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20년간 키위교회 오클랜드 크리스천 어셈블리 장로로 섬기며 교민과 키위의 교량 역할을 했다. 2012년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클래식음악 감상회를 열어 교민들에게 음악을 통한 만남의 장을 열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