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부활”

“그럴 리가 없어! 네흘류도프(Nekhlyudov)는 혼자 계속 생각했으나,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그 여자임을 깨달았다. 한때 그가 광적인 정열로 유혹하고 내팽개쳤던, 고모집의 양녀로 자란 바로 그 하녀가 틀림없었다.”

러시아의 세계적 문호 톨스토이(Leo Tolstoy)가 1899년에 발표한 소설 “부활(Resurrection)”의 한 장면이다.

살인과 절도 혐의로 법정에 선 여인을 본 순간, 그곳에 배심원으로 참석해있던 네흘류도프가 아연실색하는 모습이다.

그녀의 이름은 카츄샤 마슬로바(Katyusha Maslova). 오래 전, 고모 집에 머물고 있던 네흘류도프가 그 집을 떠나기 전날 밤 충동적으로 범한 여인이었다. 그가 떠난 후 카츄샤는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고모는 화가 나서 그녀를 쫓아내버렸다.

오갈 데 없는 카츄샤는 이리저리 전전하다 결국 매춘부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카츄샤는 돈 많은 상인을 독살해 금품을 빼앗았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기소되었다. 카츄샤는 분명 무죄였지만 무성의한 변호인과 부주의한 배심원들로 인해 유죄로 확정된다. 판사는 그녀에게 4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했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한때 무책임한 행동으로 카츄샤의 인생이 파경에 이르게했단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뒤늦게나마 모든 일을 바로잡고 싶었다. 그녀를 구명하고 결혼까지 하려 한다. 네흘류도프는 그녀와의 새로운 시작을 꿈꿨다.

소설 “부활”엔 이처럼 카츄샤와 네흘류도프의 극적인 인생반전 이야기가 담겨있다. 새로운 시작! 사실 톨스토이는 “부활”의 첫 대목에서부터 이미 그러한 봄의 도래를 예고한 바 있었다.

“몇 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볼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 들었다.”

그러나 봄이 오기 전 네흘류도프가 감내해야 할 겨울은 혹독한 것이었다. 카츄샤의 석방을 탄원하며 감옥을 드나들면서 네흘류도프는 제정 러시아의 부패상을 목도해야 했다.

법의 도움을 받지 못해 감옥에 갇힌 무고한 죄인들. 그는 러시아 정교회의 타락에도 분노했고, 귀족사회의 천박함에도 몸서리쳤다.

네흘류도프는 그간 자신의 방탕하고 비도덕적인 삶을 청산한다. 유부녀와의 아름답지 못한 관계를 끊고, 또한 결혼 상대로 사귀어온 코르차진 가의 처녀 미시와도 인연을 끊었다. 네흘류도프는 감옥에 갇혀 있는 카츄샤에게 결혼을 청했다.

그러나 카츄샤의 반응은 싸늘했다.“당신은 나를 미끼로 해서 구원을 받으려 하는 거죠?”카츄사는 네흘류도프의 변화를 단지 이기적 욕구로만 여겼다.

구명은 실패하고, 카츄샤는 시베리아의 유형지로 떠나게 되었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전 재산을 농노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녀를 구하고자 시베리아로 따라 나섰다.

마침내 카츄샤는 네흘류도프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럼에도 둘은 결혼으로 맺어지진 못한다. 카츄샤의 마음이 감옥에서 만난 사회 개혁자 시몬슨(Simonson)에게로 향해 있었던 것이다.

카츄샤에게 황제의 특사가 내렸다. 네흘류도프는 그 소식을 들고 카츄샤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특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시몬슨과 더불어 유형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시몬슨 역시 그녀와의 결혼을 원했다. 네흘류도프도 이를 존중한다.

꽁꽁 얼어붙었던 카츄샤의 인생에 봄의 새싹이 돋아났다. 그녀를 부활시킨 건 다름아닌 사랑이었다. 네흘류도프 역시 부활했다. 그가 만난 다른 방식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 사랑은 연인의 모습이 아니라 지적 깨달음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진술이 아래에 있다.

“이제야 네흘류도프는 사회와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합법화된 범죄인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부패와 타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이 서로 돌보며 서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깨달았다.”

네흘류도프의 의식은 죄의 자각과 용서의 정신으로도 충만했다.

“타인을 벌하고 교정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죄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네흘류도프의 사상적 각성은 시베리아 벽지의 어느 여관방에서 펼쳐 든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산상수훈을 읽는 중에 극히 단순하고 명백하며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계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계율만 실행된다면 인간 사회는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갖게 되고, 네흘류도프를 그토록 분격케 했던 온갖 폭력도 자연히 소멸될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허용된 최고의 행복인 지상천국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네흘류도프가 발견한 계율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눈에는 눈 식의 복수를 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등 다섯 가지였다. 그의 눈 앞에 지상천국이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램프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그는 더 이상 이전의 네흘류도프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린 여기서 잠시 멈춰 설 필요가 있다. 책을 잠시만 덮어두자. 소설예배자로서 우리도 성경 속으로 들어가보길 원한다. 꼭 유념해야할 것은, 소설 “부활”이 성경의 부활에서 제목을 따고 있지만 실상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톨스토이는 부활의 이미지를 카츄샤의 인생반전이나 네흘류도프의 개과천선으로 그리고 있다. 산상수훈에서 얻은 다섯 가지 계율이 그에겐 부활에의 길이었다. 그의 부활은 장차 인간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낼 지상천국에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 라고 하셨을 때의 부활은 톨스토이의 그것과 전혀 다른 의미다.

성경의 부활은 로마서 6장이 말씀하는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함께 살게 되는 그것이요, 데살로니가 전서 4장이 묘사하는 대로 장차 주께서 하늘로부터 친히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게 되는 바로 그 가슴 벅찬 사건을 가리킨다.

소설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자. 톨스토이의 “부활”은 성경의 관점에선 결코 부활의 완결일 수 없다. 그 영원한 여정의 프롤로그에 불과하다.

소설 “부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그의 인생에 있어 이 새로운 시작이 어떠한 결말을 맺을지, 그것은 미래가 말해줄 것이다.”

그 말이 맞다. 네흘류도프가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그에겐 여전히 희망이 있다. 인간의 공로와 의로움에 절망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무릎을 꿇게만 된다면. 부활의 예수께서 이미 그 앞에 계시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