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는 죽음 입는 죽음

인진우목사<하늘그림교회>

176

고린도후서 5장1~5절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오늘 본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이라고 말하며 우리의 육신을 ‘장막’(일시적인 공간)이라고 표현합니다.

지금 바울은 이 장막 집(육체)이 무너지면 또 다른 집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비행기에 연료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어디에 착륙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진정 죽음이 주는 공포이며 벗어날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살아있을 때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은 삶을 더욱 힘 있고 지혜롭게 합니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가족들은 그 병에 대해선 준전문가가 될 뿐 아니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길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언2:4~5)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도저히 모르겠다고, 말씀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투정들은 교회마다 넘쳐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은을 구하는 것 같이, 보물을 찾는 것 같이 찾으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고백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바울처럼 탄식하며 어서 이 땅에서의 시간이 끝났으면 하고 바라는 분이 계십니까?

이 땅에는 분명 좋은 일도 많고, 즐거운 일도 많고, 보람되고 기대되는 일들도 많지만, 두렵고, 괴롭고, 외롭고, 마음 상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아니, 어쩌면 살기 힘든 순간이 월등히 많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점점 악해져가는 세상의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변화와 오염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내가 사랑하는 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열악한 환경을 바라볼 때마다, 나이 들고 병들어 사랑하는 가족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야 할 때마다 우리의 심정은 무너져내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는게 힘들고 괴로워서, 인생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죽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육신이라는 장막을 빨리 벗어버리고 싶어서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덧입고자 탄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4절)

죽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옷을 벗고 죽는 것인데 이 죽음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게 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들에게는 죽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죽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죽는 죽음을 성경은 세례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라디아서3:27)

바울은 이 죽음을 가리켜 “죽을 육신이 생명에 삼킨 바가 되는 것” 이라고 표현합니다. 종종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면 우리는 충동적인 천국소망에 사로 잡힙니다. 이렇게 사느니 그냥 빨리 죽어 천국에 가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참 복음의 내용은 성도가 죽어 이 땅을 떠나 만나는 하나님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어 죽는 순간(세례 받는 순간)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 즉 천국생활이 시작되는 것에 대한 소식입니다.

만일 바울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몸으로 덧입기를 날마다 사모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때가 되어 이 육체의 장막을 벗는 날에 벌거벗은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발견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죽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임금의 잔치 자리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했다가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마태복음22:11~13)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는 임금의 질문에 그가 아무말도 못한 이유는 입어야 할 예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 입어야 할 예복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그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그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나는 죽고 그 분으로 옷 입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 불편해하고 싫어합니다. 자녀들이나, 배우자를 대할 때,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 분의 방식과 길로 행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그것을 매우 불편해하고 손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 분의 방식 (그리스도라는 옷)으로 행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세상의 옷)으로 행합니다.

예복이 있음도 알고, 입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입지 않고 잔치 자리에 앉아있다가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는 정확히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당신은 정말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장막이 있음을 믿습니까? 성도는 썩어질 이 몸을 벗어버리고‘자연사’하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썩을 이 몸이 날마다 생명의 성령에게 삼켜져 죽기를 사모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마땅한 성도의 죽음이며 그 죽음에만 영생의 약속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죽는 그 죽음만이 우리를 삼키려는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케하는 능력이 됩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거든 날마다 그리스도로 옷 입어 죽는 죽음을 죽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