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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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에서 키우는 양들이 우리 뒤꼍을 오고 가며 풀을 뜯는데 올 봄에 암컷 양들이 며칠 사이로 각각 두 마리씩 모두 여덟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그런데 몇 주 동안 밤낮없이 내린 봄비에 막 태어난 어린 양들은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다가 금방 죽을 것만 같아서 누가 어떻게 좀 했으면 좋으련만 어미 양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새끼가 일어나더니 어미 젖을 빨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법 커서 초지를 뛰어다니고 먹을 것을 주면 달려온다.

어미와 새끼 모두에게 기다림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생명의 힘과 그 기다림 속에 생명에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게 되었다.

기다림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특히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자신만의 지독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이 있다. 그 기다림은 생과 사가 갈리는 시간이고 성취와 무너짐이 갈리는 시간이다.

기다림 없이 되는 것이란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다림은 우리에게서 많은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기다려야만 열매의 속이 자라고 속이 채워져 가기 때문이다.

목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다림의 사역이다.
하나님과 자신에 대하여, 기도 응답과 꿈의 성취에 대하여, 특히 사람의 변화에 대하여서는 긴 시간을 오래도록 기다려야 한다. 그 기다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도 무력하게 느껴질 만큼 목회는 고통스런 기다림의 연속과 반복이다.

기다림이 기쁨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소망이 있기 때문인데 소망마저 보이지 않을 때 기다림은 오히려 절망의 늪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 깊은 절망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만약 목회자들이 기다림의 시간에 하나님마저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때 목회는 시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뉴질랜드에 온 모든 한국인들이 느끼는 것이겠지만 나 역시 빠름의 익숙함을 내려놓는 것이 힘들었다. 전기와 전화 설치를 신청하고 일주일 이상을 기다리고, 인터넷 속도는 56k 모뎀이어서 이메일 하나 확인하는데 20분 이상 걸릴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급변하는 속도의 변화 속에 살고 있다. 속도가 라이프스타일과 유행을 바꾸고 있다.

인터넷 쇼핑을 하는 사람들이 마우스를 손에 쥐고 상품을 고르는 시간은 불과 2,3초 안쪽이라고 한다. 그 짧은 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지 못하면 마우스는 ‘휙’하고 다른 상품을 찾아 떠난다.

사회적 시스템과 분위기도 성과와 실적 위주로 최적화되어서 모두가 거기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져 있다. 뭐가 안 되면 빠르게 다른 것으로 전환하려고 한다. 이것은 좋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또 하나의 유혹이 될 수도 있다.

빠른 결과에 대한 갈증은 사람과 일 모두를 조악하게 만든다.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은 언제나 조잡한 것을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목사는 교인에 대하여 교인은 목사에 대하여 진득하고 우직하게 기다려 주는 것이 갈수록 쉽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개 교회와 목회자들마다 개별적인 사정과 내용이 있을 수 있어서 거론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지금 말하려는 것은 실제로 교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어떤 교회는 목사를 청빙한 후에 새롭게 부임한 목사가 일정 기간 동안 어느 정도 부흥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퇴출시키고 또 다른 목회자를 찾는다.

어떤 교회는 목사의 나이가 연소하면 경륜이 부족하다고 가볍게 여기고, 또 목사의 나이가 많으면 패기와 활력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바라기는 교회는 목회자에 대하여 기다려주어야 한다.

목사의 신앙과 인격이 무르익고 예배와 설교 등 여러 면에서 완숙해지고 성령 충만해질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 기다림을 감당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목회자만 바꾸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어떤 목사들은 짧은 2,3년 안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를 반복한다. 또한 진득하게 교회를 섬기며 목회하는 목사들 중에는 도무지 그 믿음과 인격이 변화되지 않는 교인들을 보면서 속이 타 들어간다.

기대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끝내 달라지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기다림에 상처를 받고 새파랗게 멍이 들고 지쳐버린다. 문제는 과연 기다려도 될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가치 판단이다.

목회의 어려움은 양육 프로그램이나 예배, 말씀과 기도, 설교, 행정 등 많은 복합적 요소가 함축되어 있지만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을 꼽는다면 단연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삶의 조각들을 맞추는 시간이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길고 힘들게 느껴진다.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기다림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항상 거의 다 와서 마지막에 무너진다.

특히 목회는 사람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득하다. 그 기다림이 깊어질 때 고통이 된다.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과 주님의 말씀을 바라는 것밖에 다른 대안이 없기에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주님을 기다리는(시편 130:5-7) 것과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 언제까지 입니까?’라는 간구를 반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씨앗을 뿌린 후 싹이 나고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데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나지 않는 것 같아서 기다리지 못하고 땅을 헤집는다. 아직 충분히 익지 않은 과일을 미리 따서 손에 들고 못 쓰게 되었다고 바닥에 내버린다. 기다리지 못함이 곧 실패이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머물러야 하는 대기실과 같아서 이 기다림의 시간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을 찾지 못한다면 기다림에 지쳐 탈진하고 스스로 붕괴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어느 날 갑자기 신속하게 온다. 그것은 우리가 구하거나 상상했던 그 이상이기에 기다림은 언제나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 건강한 교회, 건강한 목회자, 건강한 교인은 그렇게 서로 기다림 속에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기다려야만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