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은 나의 어릴 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 속의 주인공이다. 지금도 금산에서 우리 아버지가 인삼 재배를 가장 크게 할 때의 장면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1950~1960년, 내가 10세 전후의 초등학생 시절을 기억해 본다. 금산읍 중도리- 마당이 꽤 넓은 우리 집은 온통 인삼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방에도 저방에도 가득, 마루에도 마당에도 가득, 우물가에도 가득, 마당 한 쪽에는 금방 캐어 흙이 묻어있는 수삼 무더기가 놓여있고, 저쪽 마루에는 말리고 있는 젖은 인삼들이, 또 안방에는 완전히 말라서 꼬부라진 때굴때굴 단단해진 인삼들이 그득히 쌓여 있었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인삼은 비싼 물건! 보약이며, 한약에 넣는 필수재료’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엄마 아버지는 인삼 일 때문에 항상 바쁘다. 일꾼들이 새벽부터 우리 집에 많이 온다. 엄마는 아줌마들과 함께 많은 음식을 차려낸다. 밤이 되면 아버지는 일꾼 아저씨들에게 일당을 지 급한다. 가마니 속에 그날그날 지급해야 할 종이돈이 가득 있다.” (요즘과 달리 무조건 당일에 현금으로 품삯을 지급했다.) 이렇게 남아 있다. 그러니까 나는 꽤 넉넉한 인삼 집 맏딸이었다.
아버지의 인삼 농사
“충남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 3구 403.”가 나의 본적이며, 그 당시 우리 집 주소다. 지금도 그 곳에는 인삼 협동조합이 있고, 군청이 있는 금산의 중심지이다. 인삼을 심고 수확하기까지는 거의 4년에서 6년이 걸린다. 수확하고 난 삼장(인삼밭을 우리는 삼장이라 부른다)에는 한참동안 어떤 식물이나 채소도 심을 수가 없다. 삼이 땅속의 영양분을 다 빨아들였기에 땅을 놀려야한다. 아버지는 진악산에 몇 에이커인지도 모를 넓은 삼장을 개간했고, 매년 장소를 옮겨가며 연속적으로 사업을 운영해야 했기에, 계속적으로 새로운 땅을 확보하거나 개간을 하셔야 했다.
여러 곳에 있는 우리 ‘삼장’ 중에서 가장 큰 곳이 진악산 삼장인데, 수천 칸이 되는 그 큰 밭을 내가 직접 걸어 다니며 구경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트럭에 나를 태우고 삼장 전체를 구경시켜 주셨다. 그곳엔 5년근 삼을 캘 때까지 ‘삼장’을 지키는 옥배 아저씨네가 살고있었다. 도둑을 지키느라 엽총 두 자루를 지니고 사납고 덩치 큰 진돗개 두 마리와 함께 살았다.
읍네 시장이 서는 날이면 아저씨는 생필품을 구매하러 읍내로 내려온다. 허가된 엽총으로 꿩을 잡은 날엔 의기양양 신바람이 나서 우리 집에 가지고 오기도 했다. 그 꿩의 털 색깔이 엄청 화려하고 예뻤던 기억이 있다.
인삼 수확기의 추억들
7, 8월 한국의 여름은 내 기억 속에는 인삼 수확철로 남아있다. 4, 5년간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키운 인삼을 캐어 오는 날은 너나없이 어느 집이든 온 동네가 잔칫날이다. 저 멀리 동네 어귀에서부터 풍악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신명나는 풍악대(요즘의 사물놀이)는 우리 큰아버지가 대장이었다. 춤과 노래, 끼가 많으신 큰아버지는 어디를 가도 인기 만점이었다.
몇 트럭 가득 실은 인삼이 우리 집에 도착할 무렵, 아버지와 엄마의 일손은 더욱 바빠진다. 집에서 푸짐하게 담근 막걸리, 몇 지게씩 사들인 노란 참외, 개구리참외, 수십 통의 수박…. 저녁때쯤이면 동네 아줌마들의 이름과 번호가 붙은 수백 개의 소쿠리들이 우리 집 마당에 쌓인다. 때 론 너무 많은 소쿠리가 쌓여 일부를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대문을 걸어 잠그셨다.
나는 담장위로 기어 올라가서 여분의 소쿠리를 도로 가져가라고 밖으로 내던졌다. 나는 이 작업을 매우 재미있어했던 기억이 난다(내가 밖으로 내던진 소쿠리를 아줌마들은 다시 담 넘어 우리 집으로 던지고….). 각자 이름을 붙인 이 소쿠리에는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아저씨들이 등급 별로 구분하여서 소쿠리 당 20, 30, 50 뿌리씩 담는 작업을 한다.
새벽 4시부터 대문이 열리면 다시 아줌마들이 몰려온다. 자기 소쿠리를 찾아서 ‘가는 다리’(미삼)는 떼고, ‘중간 다리’(중미)까지만 붙여놓고 개수를 센 후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간다. 껍질을 깎아야 하기 때문이다. 흙을 털고 깨끗이 씻은 인삼은 반드시 대나무 칼로 껍질을 긁어야 한다.
껍질을 깎고 나면 뽀얀 살갗에 날씬한 몸매가 드러난다
아침 햇살이 뜰 무렵 아줌마들은 거의 다 깎아온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소쿠리 숫자만큼 인건비를 지급했다. 이렇게 인삼깎기는 한여름 새벽 시간 금산 아줌마들의 쏠쏠한 수입이 되었다. 매일 아침 두둑이 모은 돈으로 가을이 되면 아줌마들은 장롱이나 살림살이를 바꾸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대전이나 유성으로 관광을 떠나기도 했다.
뽀얗게 깎아온 수백 개 수천 개의 수삼은 널찍한 멍석에 널어놓고 태양 볕에 말린다. 꾸덕꾸덕 사흘째가 되는날 손으로 비벼서 다리를 꼬부리고 왕골로 묶는다. 이때 화학 실이 아닌 반드시 왕골로 묶어야한다.
며칠 동안 바짝 마른 인삼은 차돌처럼 떼그락떼그락 소리가 난다. 나는 차돌 인삼으로 가끔 공기놀이를 한다. 장난감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나에게는 말린 차돌 인삼이 아주 좋은 장난감이었던 것이다.
인삼집 딸의 추억
드디어 검사하는 날, 잘 준비된 인삼들은 상품 등급을 받기 위해 인삼 협동조합으로 보내진다. 여름철 내내 엄마 아버지는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투기사업에 워낙 많은 재정을 쏟아 붓고, 크고 작은 도난에 노출되기도 하니까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가끔 어떤 아줌마는 커다란 몸빼 바지 속에 인삼 몇 뿌리를 감추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줄을 알게 되더라도, 아버지가 차마 아줌마 속옷을 들춰 볼 수는없었으니, 요즘같이 CCTV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던 시대의 산물일까?
1980년 내가 뉴질랜드란 나라로 시집간다고 한국을 떠날 즈음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다. “야야 뉴질랜드에도 인삼이 있냐? 그 나라에도 인삼을 키울 수 있냐? 인삼 재배가 가능한지 알아봐라! 그것 좀 꼭 알아봐라” 신신당부를 하시던 아버지….
한국을 떠나온 지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제 43년이 지났으니 뉴질랜드에서 살아온 세월이 한국에서보다 더욱 훨씬 더 길어졌다. 그래도 몇 년에 한 번씩 가족들을 뵈러 한국에 갔다. 최근 마트에서 종종 인삼 제품을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고향 사람을 만난 것 이상으로 더욱 반갑다.
1960년대의 기억이나 지금이나 인삼에 대한 나의 기억은 달라진 게 없이 똑같다. 인삼에 대한 사업? 경영? 효능? 가격? 재배? 이 모든 영역이 나에겐 도통 관심이 없다. 오로지 어릴 적에 우리 집 중도리 3구에 살 때 온통 집안에 인삼으로 가득히 쌓여 있었던 기억, 아버지 엄마는매일 바쁘다. 일꾼 아저씨들이 매일 우리 집에 온다.
골목마다 울려 퍼지는 풍악소리 담장 너머 공놀이하듯 소쿠리를 내 던지던 일! 인삼 관련 단어와 말들… 진악산 삼장, 덧발, 통때, 뇌두, 인삼씨앗(빨간 석류알처럼 이쁘다), 세근(모종), 껍질을 깎는 칼(쇠가 아닌 대나무로 만든), 왕골, 미삼, 중미, 밤삼, 호박엿장수 아저씨도 한철(깎은 삼껍질로 호박엿을 사먹는다).
생전의 아버지가 종종 내게 하시던 말 “야야 뉴질랜드에도 인삼이 있냐? 그것 좀 꼭 알아봐라!”
코타령 코순이가 나의 별명
팽! 팽! 팽! 원래 시도 때도 없이 코를 풀어대던 사람이라 “코순이”가 뉴질랜드에서의 나의 별명이었다. 이제는 뉴질랜드에서 살아온 나의 인생 후반부의 세월이 시집오기 전까지 살았던 세월보다 훨씬 더 길어졌으니, 누군가 코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웬만한 돌팔이 코 박사쯤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자의 반 타의 반 돌팔이지 의사는 아니기에 여기에서 전문적인 의학을 논하기 보다는 순전히 코순이의 경험담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사람은 자기에게 닥친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 때 그 누군가가 그 어려움의 내용을 확실히 이해만 시켜주어도 그 문제의 절반은 해결하고 들어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종종 한국인들이 이런 말을 한다. “뉴질랜드에 와서 내내 감기 증상이 있어요. 한국 약을 아무리 먹어도 감기가 안 떨어지네요. 아주 짜증이 나요. 이렇게 공기 좋은 나라에 왔는데 왜 그럴까요?” 이런 분들이 있다면 코순이에게 오라.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면서 자나 깨나 이 말썽꾸러기 코를 진단해 본다. 내 코가 작아서 그런가? 아니면 낮아서 그런가? 치수를 재어 보다가 남편까지 끌어들여 같이 재어 보자고 했다. 처음엔 이상한 듯이 생각하더니 웃으면서 나중엔 줄자까지 들고 와서 동참하였다.
코순이의 코 길이가 6cm 남편은 7.5cm, 콧방울의 넓이는 코순이 3.0cm 남편은 3.9cm, 콧구멍 지름은 코순이는 1cm 남편은 2.5cm, 서양 사람은 코가 크니까 당연히 클 수밖에. 점잖은 남편도 콧구멍의 지름을 잴 때는 저절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사람과 사체와의 차이는 이 콧구멍에 생과 사가 달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모의 양귀비 코나 클레오파트라의 코나, 3층에서 떨어진 메주 코나, 코로 받는 고통이 있다면 그 크기와 모양새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