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마른 몸 닫지 않는 너의 자세, 닮고 싶다

로토루아에서
벌써 십 년도 넘은 옛날 일이지만 가을이 깊어 잎을 모두 떨구고 앙상한 맨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로토루아(Rotorua) 호숫가에 있었던 나무 생각이 납니다.

로토루아는 뉴질랜드 교민이라면 누구라도 한두 번은 가보았을 북섬의 대표적인 관광지입니다. 아직도 지열(地熱) 활동이 활발하여 뜨거운 진흙탕으로 된 간헐천(間歇泉)을 만들어내고 도시 한가운데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어 언제나 국내외의 관광객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우리 부부도 이곳을 좋아해서 몇 번씩 다녀왔지만 그 가을엔 로토루아에 있는 교회 한 곳에 일이 있어서 하룻밤 자고 오려고 오후에 오클랜드를 떠났습니다.

늦가을 차창으로 비쳐 드는 햇살은 투명했고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곤거리는 아내와 더불어 서서히 차를 몰고 가는 길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웠습니다.

저녁나절 로토루아에 도착한 뒤 숙소에 들기 전 박물관 뒤편 로토루아 호숫가를 거닐다 의외로 아름다운 곳을 만나 발길이 머물렀습니다. 로토루아에 몇 번 갔었지만 과연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눈길을 사로잡는 저녁 풍경이었습니다.

일몰, 호수, 가을 나무, 작은 물새들, 눈에 들어오는 하나하나가 매혹적이어서 작은 시재(詩才)라도 있었으면 그 자리에서 자연스레 시 한 편이 나와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카메라를 꺼내 들고 아쉬운 대로 사진만 찍었습니다.

그러다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내 눈으로 들어온 풍경 하나에 나는 그만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우뚝 섰습니다.

사랑이 많은 나무
호숫가 길에서 호수 한가운데로 벋어 들은 아담한 곶(串) 위에 나무가 두 그루 있었는데 그중 곶 위의 작은 둔덕 발치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잎이 모두 떨어진 크고 작은 맨 가지들을 한껏 벌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의 발치에도 가지가지마다에도 하얀 목화송이 같은 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아니, 이 늦은 가을에 웬 꽃들이..,’하고 중얼거리다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습니다. 목화송이 같은 작은 존재들은 꽃이 아니라 하얀 물새들이었습니다.

‘세상에, 사랑이 많은 나무로구나!’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흘렀습니다. 여름 한창때의 나무 모습과 지금 헐벗은 맨몸으로 서서 작은 새들의 둥지가 되어준 나무의 모습이 엇갈려 머릿속에서 교차하면서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아내도 그 정겨운 모습에 눈을 고정한 채 같이 서 있었습니다.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자꾸 호숫가 풍경이 생각나서 할 수 없이 일어나 앉았다가 노트북을 열고 시(詩) 한 편을 만들었습니다. 작은 새들을 너그럽고 따뜻한 손길로 받아 준 나무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야 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나무야 나무야
-로토루아 호숫가에서-

나무야 나무야
너를 닮고 싶다
꽃 지고 잎 져도
빈 가지 부끄러워 않고
벌린 팔 거두지 않는 너의 자세

나무야 나무야
네게 배우고 싶다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졌어도
헐벗음 부끄러워 않고
마른 몸 닫지 않는 너의 자세

이 호수에 낮이 가고
저문 저녁이 다가올 때에

나무야 나무야
네 빈 가지 마른 몸에
내려앉는 것은 어둠만이 아니구나

이 저녁 추운 호수에
날아드는 수많은 새들도
어둠과 함께 네 위에 내려앉는구나
이 새들을 기다리느라
바람도 견디고 추위도 견디며
빈 가지 마른 몸
거두지도 닫지도 않았구나

나무야 나무야
이 호수에 빛은 가라앉고
바람은 자고 어둠은 더욱 짙어가는데

나무야 나무야
네 빈 가지에 새의 잎이 솟았구나
네 마른 몸에 새의 꽃이 피었구나
네 뿌리에 새의 열매가 쌓였구나

나무야 나무야
한창때보다 훨씬 아름다운 네 모습
어둠 속에 더욱 빛나는구나

4월은 부활의 달입니다
벌써 4월, 부활의 달입니다. 북반구와 달리 뉴질랜드의 4월은 찬 바람 부는 가을이어서 만물이 이우는 계절입니다. 부활과는 어울리지 않는 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로토루아 호숫가의 나무처럼 우리가 힘껏 팔을 벌려 힘든 이웃들에게 몸과 마음을 열어드리면 이 가을에도 부활의 잎이 솟고 꽃이 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계절에 상관없는 진정한 부활의 4월을 우리 모두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