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북동쪽에 위치한 바누아투라는 나라는 8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졌으며, 1980년 7월 30일 독립을 하기까지 약 74년간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통치를 받았던 나라로서 면적은 우리나라 전라남도와 비슷하고 인구는 약 33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지리적 여건상 정확한 인구 파악이 힘들다).
별다른 자원이 없으며 태평양의 섬나라이면서도 해양 수산업도 전무하다시피 하여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인들에 의한 부가세 등의 사업세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국민들의 소득이 없는 편이라서 국가에 대한 세금이 없는 가난한 나라이다.
하지만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지만 행복지수는 높다고 알려지기도 했었으나 오늘날에는 도심지 거주민들은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TV와 핸드폰 등의 사용으로 점차 돈의 필요성을 느끼는 반면에 시골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순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Santo 유치원
10여 년 전의 일이다. 바누아투에서 가장 큰 섬인 산토 섬에서 사역하시는 한인 선교사로부터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높은 산마루에 위치한 한 원주민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여러 차례 그 부족의 추장을 만나 시도를 해보았으나 도저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 선교사는 전략을 바꾸어 그 부족의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을 설립하여 아이들을 교육시키며 부모들에게 간접적인 복음 전파를 하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추장의 승낙으로 유치원이 설립되고 장로교인 여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칠 계획이란다.
따라서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어린이 놀이 시설을 만들어 줄 목수가 필요하다는 선교사의 요청에 따라 주님의 교회 집사님과 청년들로 구성된 단기선교팀이 그곳을 찾아가 철봉과 그네를 비롯한 간단한 놀이 시설을 만들어 주었다.
선교팀은 마을 추장이 제공한 회관(?)에서 숙박했는데 바닥은 맨땅에 나뭇잎을 엮어 짠 돗 자리를 깐 것이 전부이며 물론 전기도 없고 화장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우리를 위해 새롭게 구덩이를 파서 만든 푸세식이었다.
생전 그런 화장실을 본 적이 없는 자매는 어떻게 사용할지를 몰라 쭈그려 앉아 발을 디딜 나무 판에 편하게 엉덩이를 대고 앉아서 일을 보려니 도저히 원하는 배변을 보지 못하고 애만 쓰다가 결국 밖에서 망을 보던 인솔 여교사의 가르침을 받고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었으며, 그 회관의 돗자리 밑에서 함께 동거하던 지네가 내 겨드랑이를 물어서 통증으로 밤을 꼬빡 새웠던 추억이 새롭다.
청년들과 함께 놀이터를 만들면서도 우리의 관심은 그 부족의 사람들에게 쏠렸었는데 무더운 기후 탓에 옷이 필요치 않은 부족 주민들은 남녀 모두 풀로 엮은 것으로 아랫도리만 가려서 보기에 민망할 지경이었다. 드러난 거친 피부는 부스럼과 피부병으로 더러워졌으며 추장의 아들은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누아투 나라 전체가 워낙 열악한 의료 환경 탓에 이처럼 고산지대의 부족 사람들에게는 현대 의료 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상황이다. 상처가 생기면 특정 풀잎을 돌로 짓이겨 상처 부위에 바르고 헝겊으로 싸맨 것을 보면, 치유보다는 오히려 세균 감염이 더욱 염려스럽다.
당시 들은 바로는 몇 해 전 난산으로 진통중인 산모를 살리고자 병원으로 후송시키기 위해 부족의 남자들이 산 아래로 메고 내려오는 도중에 산모가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 부족의 경우 산 밑까지는 도보로 40여 분 걸리는 데다가 산 밑으로 내려왔을지라도 운이 좋아 트럭이라도 만나면 다시 트럭을 타고 30분을 가야 겨우 병원이 있다고 한다.
놀이터를 만들면서도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 일했던 직장이 제약회사였던 탓인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유독 피부병의 아이들이 많이 보였고 환자들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었다. 산에서 내려올 즈음에는 그곳은 복음보다도 의료 혜택이 더 먼저 절실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카바 바
피지, 사모아, 통가, 바누아투 등 남태평양 원주민들이 즐겨 마시는 카바는 카바나무 뿌리를 말려 가루로 만들거나 짓이겨 물에 섞은 토속 음료로서, 맛은 약간 씁쓰름하며 입안을 조금 얼얼하게 만들어 우리네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호주에서는 약용으로 쓸 경우에 한하여 입국 시 약간 허용되며 태평양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뉴질랜드에서도 간혹 카바 시음장을 볼 수 있기도 하다.
부족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남자들만이 ‘나카말’이라 부르는 회관에 모여서 회의를 하며 마시는 음료이다, 요즈음에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카바를 마신다고 들었다.
오리지널 카바 제조법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어린 총각이 카바 뿌리를 입으로 씹어 뱉은 즙을 그릇에 모은 것이란다. 마을에 귀한 손님이 오면 카바를 대접하는데 당연히 맛있게(?) 마셔야 답례가 되겠다.

도심지에서 막노동을 하고 받은 임금을 집에 가는 길가에 즐비한 카바 바(파랑 혹은 붉은 색의 작은 전구가 켜져 있어 찾기도 쉽다)에서 카바를 마시고 가는데 기계로 갈아 짠 원액에 돈을 남기기 위해 물을 타서 약하게 했으므로 한두 사발로는 취하지 않아 그날 번 돈을 다 쓰고 갈 수밖에 없어 가난을 유지하게 된다.
바누아투 장로교단에서는 카바를 금하도록 지침을 내렸지만 자녀들 학비 마련의 별다른 수단이 없는 어떤 목사는 자기 밭에 카바를 재배하여 시장에 내다 파는 경우도 있었다. 카바를 마시고는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계속 침을 뱉는 모습은 위생상의 문제도 되겠다. 카바를 우리네 막걸리처럼 단순한 음료로 마신다면 그다지 큰 문제는 없겠으나 마리화나와 함께 취하면 문제는 커진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어느 이단 종교의 간부가 카바를 마시고 마리화나에 취한 채 환각 상태에서 임신한 자기 아내의 배를 가르고, 동네 사람들에게 “돼지 잡았으니 와서 먹으라”고 했던 사건도 있었다.
추장의 위치
100여 개 이상의 언어가 있는 바누아투의 수많은 부족마다 각기 그들의 추장이 있는데 거의 세습으로 유지되고 있다. 마을의 전통과 결혼식 혹은 장례식 등 관습을 유지하며 마을의 대소사 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대통령 선거에도 영향을 미치며 정부에 의견을 반영시킨다. 토지는 마을 공동체 소유이므로 토지 매매가 이루어지더라도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 이외에 매년 일정액을 추장에게 지불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리더로서 절대적 위치에 있기에 사람들 간의 1차 재판은 추장이 담당하고 불복 시 2차 재판부터는 국가 기관이 맡는다.

존 프럼 데이(John Frum Day)
남쪽에 위치한 타나섬은 아직도 활화산이 활동하고 있는데, 그 섬의 특정 부족은 매년 2월 15일을 존 프럼 데이로 기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존 프럼이라는 군인이 하늘에서 떨어져서(아마도 낙오병) 식량과 옷가지 등 몇몇 물자를 주었는데 원주민들의 환영을 받고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주민들에게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후 원주민들은 언젠가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그 분을 기다리며 매년 같은 날 미군 군복을 입고 나무총을 메고는 성조기를 들고 행진하는 의식을 치르는데 이를 본 미국 관광객들은 전 세계에서 이처럼 미국을 찬양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고 웃었다고 한다.
후손 간의 화해
파푸아뉴기니에는 늦게까지도 식인 풍습이 있었다고 하지만 바누아투에서도 1800년대 영국 선교사 일행이 바누아투의 Ermango 섬에 상륙했을 때 원주민들이 이들을 죽이고 시신을 먹었던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2009년 11월, 사건 발생 170주년을 맞아 이 섬에서는 원주민의 후손들이 선교사의 후손들에게 사과하고 받아들이는 화해 의식을 행하였다.
물론 지금의 바누아투 주민들은 너무도 순수하고 선해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지금도 남쪽 작은 섬에 가면 관광객들을 위한 사진 촬영을 위해 커다란 가마솥 좌우에 창을 든 원주민들이 관광객을 솥에 넣고 삶는 연출을 하는 곳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