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Y WILSON과 변경숙의 운명적 만남

로이 읠슨의 Family Tree
로이 앤소니 윌슨(Roy Anthony Wilson)은 영국 버밍험에서 1932년 8 월 15일 태어났다. 전형적인 앵글로 색슨 계열의 영국인이다. Second name 앤소니는 그의 천주교 세례명으로 일반 서류에는 간단히 로이 윌슨으로 기재하지만, 출생 신고서(Birth Certificate), 여권, 시민권, 사망진단서 등에는 로이 앤소니 윌슨으로 적는다.

결혼 초기에 시어머니로부터 여섯 장으로 정리된 Wilson Family Tree를 전해 받았다. 그것은 바로 1800년 초기부터 약 200년간 전해 내려온 Wilson가의 가계도, 즉 일종의 족보였다. 이 문서를 통해 나는 Wilson 가로 시집 온 부인들이 남편의 성을 따른 것을 볼 수 있었고, 또 결혼한 여자가 남편의 성을 따라 족보에 오르는 풍속이 영국에 내려오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요즘에는 가끔 여자가 처녀 적의 성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개는 남편 성을 따르는 사람이 많다.

 로이의 고향인 영국 버밍험은 기계 공업이 잘 발달된 도시라고 역사 시간에 배운 기억이 있다. 결혼 후에 나는 시어머니 루시 윌슨(Lucy Wilson)이 트럭 운전을 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사진을 찍은 시기가 1920년대였으니 대한민국과 비교해보면 영국의 기계문명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기계공업의 도시인 버밍험에서 성장한 로이 윌슨은 1950년 18세 때 영국의 육군 무선 통신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바로 그 해에 한국에서는 비극적인 6.25 전쟁이 일어났다. 로이는 대한민국이란 동양의 조그만 나라가 ‘세계에서 두 번째 가난한 나라!’,‘지구상에서 하나님이 버린 나라’라는 말을 들었다.

한국에 대해 특별히 아는 바는 없지만 왠지 불쌍한 나라라고 생각됐다고 한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한국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지원서를 냈는데, 거의 결정되었다고 생각하여 영국에서 출발하려 할 즈음 참전 보류의 통지를 받았다 한다.이미 세계적으로 많은 군인이 참전했다는 이유로… 비록 그가 한국 전쟁에 참전하지 못했지만, 지원서를 써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한국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인연이 예고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 1954년, 로이는 뉴질랜드로 이주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항공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커다란 배를 타고 한 달 넘게 항해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많은 영국 사람들이 뉴질랜드를 비롯해 사우스 아프리카 등 환경이 좋은 그들의 영연방 국가(커먼웰스 Commonwealth, 과거 대영제국의 일부이던 국가들로 구성된 조직)로 이민을 갔었다.

영국에 있을 때부터 국영기업인 포스트 뱅크 공무원으로 일했던 로이는 뉴질랜드에 와서도 그대로 그 직을 유지했다. 포스트 뱅크 건물 바로 앞에는 웰링턴 항구가 있었고, 그곳에는 한국 어선들이 자주 입항하여 정박하곤 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잠시 1960년대 뉴질랜드와 한국의 인연을 설명하고자 한다.

1967년 5월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7월에 이르러 한국과 뉴질랜드가 무역, 경제, 기술협정 체결을 하도록 추진했고, 또 9월에는 박대통령이 직접 뉴질랜드를 방문하게 된다. 이후 한국의 수산 기업들과 뉴질랜드 어업간 교류가 활발해지니, 점점 더 많은 원양어선이 2년간의 계약을 맺고 뉴질랜드를 오가게 된 것이다.

나는 당시 한국 어선들의 이름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태양호, 삼원호, 동방호, 동양호, 태창호… 원양어선과 조금 작은 오징어잡이 배들도 많았다. 그래 서 웰링턴 시내에서는 한국 선원들이 이곳저곳 걸어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원양어선 송선장 부부, 로이와 나를 이어주다
원양어선 한 척에는 2년간 동고동락하는 33명의 선원들(선장, 부선장, 기관장 항해사, 일반 선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뉴질랜드 최남단 바다에서 한 달 동안 생선을 잡아 만선을 이루고는 웰링턴 항구로 들어와 한국 대사관에 입항 신고를 마치고 모든 생선을 하역한다. 그 생선들은 주로 한국이나 일본으로 수출하게 된다.

그들이 웰링턴에 머무는 날은 딱 3 일이다. 그 3일간 선원들은 가족들에게 안부도 전하랴, 필요한 물건 쇼핑 하랴. 몸이 아프면 약도 사야 하니 너무나 바빴다. 게다가 영어 소통도 원활하지 않아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었다. 이럴 때에 그들이 자연스럽게 만나서 도움을 청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웰링턴 항구 앞 포스트 뱅크에 근무하던 로이 윌슨이 아니었나 싶다.

한국 전쟁 때 연결되지 못했던 인연이 30여 년이 지난 시간에 운명처럼 뉴질랜드 웰링턴 항구에서 로이와 원양어선 선원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처럼 인터넷 정보도 없었던 그 시대, 오로지 입에서 입으로 “뉴질랜드 가서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서양 남자 로이 윌슨을 찾아가라”라는 정보가 선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에 이 소중한 정보를 들은 선원들은 항구에 체류하는 3일 중 꼭 하루는 웰링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로어하트에 있는 로이의 집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송선장과 기관장, 라디오 국장 셋이 로이의 집을 방문했다. 거실부터 모든 방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살림하는 여자가 안 보이니 궁 금함을 참지못한 송선장이 로이에게 물었다. “로이, 혼자 살아요? 왜 여자가 없지요? 결혼 안 했나요?” 당황한 로이.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둘러대는 심정으로 “I can not find a good woman.”(좋은 여자를 못 만나서요.) 했단다.

나중에 로이가 고백하기를 그가 마흔여덟이 되도록 누구에게서도 받아 보지 못했던 질문 – 심지어는 어머니나 형, 여동생한테서도(나이나 건강, 결혼, 재정 같은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친밀한 사이라도 잘 묻지 않는 것이 서양 사람들의 예의라서…) 듣지 못했던 질문을 송선장에게서 처음 들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그 자신은 여자의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고 살았으며, 스스로 직장일, 집안 살림, 요리를 다 하니 아무런 불편이 없었던, 로이! 그렇지만 1970년대~80년대 초 한국에서는 결혼 적령기를 놓치면 큰일나는 줄 알았었으니 송선장이 그에게 좋은 여자를 찾아줘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로이에게 쓴 나의 거절편지
내내 바다에 떠다니며 사는 송선장! 그가 어디에서 여자를 찾아낼꼬? 매달 웰링턴 항구에 입항할 때마다 부인에게 전보를 쳤단다. 요즘처럼 전화나 카톡을 할 수 있던 시대도 아닌데, “빨리 좋은 여자를 찾아내라.”고 마구 독촉을 했던 모양이다.

그 무렵 나는 주말이면 중학교 동기이자 송 선장의 부인인 순자 집에 놀러가곤 했다. 그녀가 시어른을 모시며 아기를 키우고 있었던 진해는 내가 일하던 마산과 불과 30분 정도 떨어진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순자가 내게 말했다. “경숙아, 우리 신랑이 뉴질랜드에서 좋은 서양 남자를 친구로 사귀었는데, 아직 여자가 없는지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살고 있단다. 천주교 신자이고 신앙심도 돈독한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데, 네가 좋은 여자 좀 찾아봐 줄래? 나는 시어른 모시고 살림만 하니까, 아는 사람이 없어.”

나는 순자의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대꾸했다. “한국에도 얼마든지 좋은 남자가 많은데, 어떤 여자가 뭐하러 외국까지 가서 서양 남자 만나냐? 서양 남자 따라가는 여자는 돈을 바라거나 민족적 주체의식이 없는 여자겠지. 정상적인 여자는 국제결혼 같은 거 안 해. 나 요즘 일 때문에 바빠서 그런 사람 알아봐 줄 시간도, 사람도 없어.” 순자 왈, “그럼 네가 그 런 여자 못 찾았다고 답장 좀 해줘라. 영어로 말이야. 나는 애 키우느라 정신없어 못해. 학창시절 내 영어점수 너도 알잖아!”

이러는 바람에 나는 그만 할 수 없이 순자의 말대로 영어 편지를 써야만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당신이 찾는 그런 여자는 없다.’라고 똑부러지게 써야겠는데… 이런 내용의 답글은 한국말로도 조심스러운데 어떻게 영어로 써야 하나?’ 고민 끝에 나보다 실력이 훨씬 나을 걸로 생각되는 연대 영문과를 졸업한 남자를 찾아갔다. 그런데 열심히 자초지종 얘기를 들은 그는 일언지하에 내 청을 거절했다. 왜 자기가 남의 편지를 대신 써줘야 하느냐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할 수 없이 나는 ‘거절의 편지 숙제’를 쓰기 시작했다.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편지글 형식을 떠올리며, 자기 이름, 날짜 쓰고, 서론, 본론, 결론 그래서 시작한 편지의 앞부분은… ‘My name is Byun Kyung Sook. I am working in Masan city. My family live in Seoul….’ 이 었고, ‘당신이 찾고자 하는 좋은 여자는 국제결혼 같은 것 안 합니다. 관심이 있는 한국여자를 못 찾아냈으니 이제 당신은 그런 생각을 단념하시오.’라는 주제를 잘 전하려 한 것이 이 편지의 주요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