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배우며 나를 마주하다
David가 나를 극단과 연결해 주는 데 중요한 다리가 되어 주었다면, 소프라노 장문영 선생은 나의 음악적인 성장을 이끌어준 분이었다. 2018년 어느 날, 코리아 포스트에 실린 노래 레슨 광고를 보게 되었다. 나는 노래 자체가 싫지는 않았지만, 평생 성악 레슨을 받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장선생 어린이 뮤지컬단을 지도했다는 내용을 보며 노래를 배우기보다는 뮤지컬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두 번만 레슨을 받고 끝낼 생각이었지만, 막상 발성법과 노래를 배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레슨을 이어가게 되었다. 노래 자체보다도 호흡을 배우고 내 안에 있던 소리를 밖으로 내뱉는 과정에서 마음속에 쌓여 있던 답답함이 풀렸고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시간이었다.
노래를 배운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장선생은 제자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 주었고, 그 자리에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두 곡의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부르게 되었다. 이후 2019년 6월에는 NSPAS Senior Vocal Competition에 참가해 이탈리아 곡으로 무대에 섰다. 비록 수상 후보에는 들지 못했지만 전문 심사 위원 앞에서 노래를 평가받는 경험은 매우 귀했고, 내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년간 노래를 배우고 이후 3년간 독일의 테너 선생께 온라인으로 레슨을 받으며, 총 5년간 이어진 노래 레슨에 마침표를 찍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즐거움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더 실력에 대한 욕심이 생기다 보니 일주일에 두 번, 많을 때는 세 번까지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서른한 살에 시작한 내 노래에는 그동안 삶 속에서 쌓여온 좋지 않은 노래 습관들이 너무 깊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것을 고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 습관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현재의 삶 속에서 감당해야 하는 일들과 시간을 줄여야 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결국 2023년 10월, 차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노래 레슨을 내려놓게 되었다.
노래는 ‘표현’이기에 먼저 내 안에 음악적인 세계가 형성되어야 하고, 그 세계가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따뜻하게 불렀다고 생각한 노래가 녹음해 들어보면 딱딱하고 군가처럼 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절박함이나 신념을 표현하는 노래는 비교적 쉬웠지만 사랑과 기쁨을 노래하는 일은 어려웠다.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웃고 있다고 느껴도 실제로는 무서운 표정이라는 피드백을 받았고, 내가 느끼는 감정과 밖으로 드러나는 표현 사이의 간극을 계속해서 마주해야 했다.
이러한 경험은 비단 노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며 당황하는 이유는 자신이 듣던 소리와 타인에게 들리는 소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는 말투와 행동, 그리고 삶의 태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내가 가진 것과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 사이에는 늘 간극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내가 사랑으로 말했다고 믿어도 상대가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사랑은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러한 괴리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따뜻함을 담아 불렀다고 생각한 노래가 어둡게 들렸다면 관객을 탓할 수 없었다. 그 결과는 결국 나라는 나무가 드러낸 열매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맺고 있는 열매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눅 6:44)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뮤지컬에는 ACT 1에서 제자들이 서로 다투는 장면과 ACT 2에서 전도사와 교사 사이의 갈등 장면이 등장한다. ACT 1은 성경 속에서 제자들이 누가 큰 자인지 반복해서 다투는 모습과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았던 사건에서 영감 받아 구성되었다.
ACT 2의 갈등 장면은 2016년, 성탄 연극을 준비하며 교회학교 부서 안에서 겪었던 나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성탄 행사를 앞두고 메시지에 대한 고민 속에서 연습을 진행하던 중, 교사 큐티 세미나와 연습 일정이 겹치게 되었고, 나는 연습을 선택했다. 이후 ‘굳이 연습해야 했냐’라는 말을 전해 들으며 마음이 상했었고, 그 감정을 숨긴 채 성탄 공연을 올렸다. 공연은 은혜로운 시간으로 남았지만, 그때의 상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조명 속에서 내가 옳다고 확신했던 선택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믿었던 방식들 속에 사실은 나의 욕심과 자아 성취, 그리고 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숨어 있었음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ACT 2에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두고 다투는 전도사와 교사들의 모습을 담게 되었다.
뮤지컬적으로 이 두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가사는 다르지만 동일한 멜로디를 사용하기로 하고 작곡가에게 의뢰하였다. ACT 1에서는 제자들이 다투는 장면을 다소 우스꽝스러운 멜로디로 표현하여 그 모습이 관객들에게 아름답지 않게 인식되도록 했고, ACT 2에서는 같은 멜로디를 느리고 낮은 음역으로 부르게 함으로써 전도사와 교사들의 모습 또한 제자들의 다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했다.
즉, 극작가로서 나는 이 장면들의 멜로디 자체를 부정적인 의미로 설정하였다. 겉으로는 정의로워 보이는 가사를 노래한다고 할지라도 그 멜로디를 부르는 순간 관객에게는 부정적으로 다가가도록 의도한 것이다. 실제로 뮤지컬이나 영화와 같은 예술 작품에서 반복되는 가사나 멜로디, 특정 행동을 사용하는 것은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고,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중요한 장치 중 하나다.
이 뮤지컬의 ACT 1과 ACT 2는 상황도 다르고 가사도 다르지만 같은 멜로디를 사용함으로써 결국 동일한 부정적인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교회를 위한 고민이라는 외형은 의로워 보일지라도, 그 열매는 아름답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이 뮤지컬은 전하고 있다.
교회에서 태어나 지난 세월 동안 교회를 집처럼 여기며 살아왔지만, 내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성숙해지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늘 남아 있었다. 성악을 배우기 전, 삶 속에서 쌓여온 잘못된 노래 습관들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과 상관없는 상태로 교회를 다니며 왜곡된 믿음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성악가 앞에 섰을 때 나의 모든 부족함이 드러났듯이, 창조자이신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위선적인 모습들 또한 숨김없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나는 평생 쌓여온 잘못된 노래 습관들을 고치는 것을 포기했었고, 동시에 내 인생의 선택들이 만들어낸 오늘의 나를 변화시키는 것 또한 포기하며 절망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을 때, 단지 내가 회칠한 무덤임을 깨닫게 하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시고, 그 안에 생명을 주셔서 무덤에서 일어나게 하셨으며, 이제 예수님 안에 거하도록 이끄셨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께 붙어 있음으로써 예수님만을 드러내는 열매 맺기를 소망하게 하셨다. 오늘 우리의 모든 열매가 주님만 드러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