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의 병원 상태와 질병들

병원은 380평의 십자가 모양의 단층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수리하여 진료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주위에 널리 알려 지면서 환자도 끊임없이 찾아왔다. 몇몇 간호사들은 안식년으로 한국으로 떠났고 여 의사 한 분과 몇몇 간호사들도 새로이 와서 우리와 함께 진료에 동참했다. 질병들은 요로 결석증, 설사, 관절염, 결핵, 피부병과 안과 관련의 질환 등이었다.

물 사정이 나빠서 생긴 병은 허다했다. 물은 인더스 강물이 수도관을 통해 가정으로 공급되는데 하루에 한 두시간만 공급되었다. 병원에는 물 공급이 안되어 주기적으로 트럭 배달을 통해 사다 쓰곤 했다. 물은 석회질이 많고 청결하지 못해 어른들은 요로 결석증이 많았고 어린이들은 설사 환자가 많았다. 사람들은 물을 끓여 먹지 않아 설사가 많았는데 한 가정당 어린 자녀들 두 세명이 죽는다고 했다.

한국에서 단기 선교팀들이 왔을 때에 물을 끓여 주었는데도 팀원들의 반 정도는 설사를 하곤 했다. 이유는 물이 몸에 적응이 안 되어 그런 것 같다. 필자도 처음에 물에 적응이 잘 안되어 1년 이상 설사를 했다.

관절염 환자는 젊은 층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파키스탄의 회교법에는 한 남자가 네 부인을 얻을 수 있고 한 부인은 십여명의 자녀를 두었다. 부인은 자녀들을 다 돌볼 수 없어 언니들이 동생들을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모습을 보곤 했다. 대가족을 이룬 경우에 여자들은 가사일이 많아 관절염이 많았다. 필자가 집세를 내고 살았던 집의 주인은 부자여서 그런지 부인마다 집을 사주어 따로 살도록 한 것을 보았다.

결핵 환자도 아주 많았다. 환자 자신이 중증 결핵에 걸린 것을 모르고 내원한 두 명의 환자가 있었다. 환자는 심할 때까지 약국에서 기침약만 사 먹어서 결핵약을 1년 이상 복용하도록 했다. 필자도 그런 종류의 한 사람이 된 것을 늦게 알게 되었다. 4년 가까이 환자를 보는 가운데 결핵균이 감염된 것을 모르고 기침 약과 항생제만 복용했던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방사선 검사를 해보니 왼쪽 가슴에 작은 둥근 모양의 석회가 보였다. 그래서 반복적인 객담검사와 배양검사를 한 결과 음성으로 나왔고 낫는 과정이라고 하여 결핵약은 먹지 않았다.

파키스탄의 이슬람 사회의 비극과 복음 전파의 어려움
무슬림이 인구의 97%인 파키스탄에서 복음 전파는 불법이며 무슬림이 개종되어도 가족들의 반대로 무슬림으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단지 기존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갖도록 인정받았다. 인정된 기독교인들은 영국이 식민통치로 1947년 8월 14일에 종료되기 전에 믿던 사람들이었다. 그날은 영국이 파키스탄과 인도를 분할 독립시킨 날이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8월 14일을 독립 기념일로 정하고, 인도는 8월 15일을 우리 나라와 같이 독립한 날로 기념한다.

필자는 파키스탄에서 겪은 처참한 상황을 듣기도 하고 이웃이 당한 아픔을 함께 느끼기도 했다. 그것은 기독교로 개종한 친구를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살해한 사건을 들은 것이다. 또한 우리와 교제하던 이웃에 사는 연로한 ‘나아만’ 목사님의 아들이 해를 받은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과격한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아들 ‘오벳’을 총으로 살해하고 도주했다. 온 가족은 슬픔으로 지냈는데 우리가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몰랐다. 아들 ‘오벳’은 딸, 미경이를 자신의 오토바이로 태워주며 놀아 주기도 했고 그 목사님은 필자의 아내 이름을 ‘사라’로 이름 지어 주었으며 우리는 사모님을 맘이라고 불렀다. 참 어려운 상황을 경험한 순간들이었다.

동남아 여선교사들의 피랍으로 인한 간호사들의 몸조심
오래전에 이화여대를 통해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파송된 전재옥 교수님이 계셨다. 필자가 한국에서 만나 뵈었을 때 개종한 여동생을 오빠가 칼로 살해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 팀 모두가 ‘싸카’에서 우르두’어를 공부하던 때에 공부에 지친 자매들이 단체로 기차 여행을 하겠다고 해서 말렸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아시아에서 온 여선교사가 피랍되었고 그 후에 또 일본 여선교사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나면서 주위에서는 다음은 한인 선교사라고 해서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신 무슬림의 개종
개종이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회교도의 한 종파인 이스마엘 종교인 두 형제를 전도할 수 있었다. 우리가 ‘싸카’에서 살 때에 기독교 청년이 자기 친구인 ‘술레만’(솔로몬의 ‘우르두’어)을 소개했는데 그는 학교 재정부 책임자였다. ‘술레만’은 우리 집을 자주 놀러 왔던 똑똑한 청년으로 자연스럽게 복음을 여러 번 전할 수 있었다.

일년 반을 교제하던 중 카라치에 온 후에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금요일 어느 날 그가 동생과 함께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그들을 처음으로 현지 교회에 데리고 갔다. 교회에서 예배가 시작되어 설교를 듣는 중에 옆에 앉았던 그에게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진지하게 속삭였다. 그것은 필자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는데 오랫동안 만났어도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술래만’은 필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필자는 예배 후에 지체하지 않고 ‘술레만’을 단상 앞으로 이끌면서 같이 따라온 동생에게도 권면했다. 두 형제는 설교를 마친 선교사 앞에 서게 되어서 필자는 두 형제는 예수님을 인정했으니 결신 하도록 부탁했다. 선교사는 주님을 영접하는 결신문을 한 마디씩 따라 하게 하여 두 형제가 회중 앞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술레만’은 ‘카라치’에서도 교제를 나누면서 1993년 후반 교회에서 결신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기뻐서 이들을 크게 격려하고 싶었다. 그래서 두 형제와 교인 몇 명과 함께 ‘마리오트’ 호텔에 가서 점심을 대접하며 믿음에 계속 서기를 권면했다. 그 후에 그들은 고향 ‘싸카’로 이동하면서 다시 만날 수 없어 아쉬워했는데 그들이 계속 교회에 다닌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술레만’은 장남이어서 부모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 소식을 들으며 아내와 함께 크게 기뻐했다. 우리는 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동생까지 결신하고 가족이 허락하여 교회에 계속 나갈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신 하나님께 크게 감사드렸다.

이해할 수 없었던 이슬람 문화
필자가 경험한 이슬람 문화를 소개한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다. 필자는 현지 교회를 다녔으며 그 교회는 건물 없이 목사 사택 마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교인 50여명이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예배 중에 찬송을 부르고 나서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가를 강단 위에다 놓고 제자리에 앉았다. 성경을 볼 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성경을 강단에서 가져와 읽고 다시 갖다 놓았다.

필자는 가져간 찬송가와 성경을 땅에 놓아 예배 중에 일어날 필요가 없었으며 교인들이 예배 중에 소란스럽게 오고 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예배 후 물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고 이것은 이슬람 문화에 속한 것이었다. 이슬람권의 사람들은 성경과 찬송가를 거룩한 책으로 보기 때문에 땅바닥에 놓지 않는다고 했고 무슬림들은 코란을 절대로 바닥에 놓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이나 찬송가를 바닥에 놓으면 우리를 무시하여 전도해도 듣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성경 외에도 일반 책이나 공책까지도 아주 귀중히 여긴다고 했다. 필자가 이런 문화를 알지 못하고 실수한 때가 있었다. 필자가 어떤 큰 건물 앞에서 교인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되어 다리가 아파 공책을 대리석 층계에 놓고 그 위에 앉았다.

그 때 같이 기다리던 교인이 필자를 보고 빨리 일어나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우리를 이상하게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책이나 공책안에 있는 내용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책 자체나 공책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슬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문화가 다를지라도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그 문화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적 갈급함에 대한 고민
파키스탄에서 사역하는 가운데 영적 싸움이 많았다. 사람 들과의 관계속에서 갈등이 일어날 뿐 아니라 필자 자신이 영적으로 바로 서 있는지 고민이 되었다. 팀원들 안에서 의논할 일이 생길 때에 의견이 다르면 회의 진행이 길어 지기도 하고, 우리의 임시 거처인 방갈로를 준비한 ‘지완 비숖’이 뇌물을 요구하여 거절하기 위해 잠시 해외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 외에도 현지인 기독교인들이 서로의 갈등으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곤란해지기도 했다. 또한 자녀들을 이슬람 분위기의 학교에 보내는 것도 문제가 되어 선교사가 세운 먼 곳의 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필자는 팀의 대표로서 모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했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 애썼다. 낮에 기도할 때마다 손목시계를 눌러 시간을 재며 2시간 24분을 기도하고 잠자곤 했다. 주님께서 필자의 고민을 꿈으로 알려 주시곤 하여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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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형식
고려대 의과대학원 및 총신대학원 졸업. 지구촌선교센터 대표. 의사와 한의사로 살면서 하나님의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나누며 다민족에게 복음을 실제적으로 전할 수 있는 전도 방법(노방전도)을 전수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