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과 이민 삶의 현실
아내가 한참 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는 시간 동안 내 방 서재에 있던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온다’ 라는 책 제목에 다시 한번 사로잡혀 책을 읽으며 한편으로는 위로와 위안이 되고 희망이 생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낙담이 되어 도대체 나의 새벽은 언제일까? 나의 밤은 왜 이리도 긴 것일까? 그렇다고 과연 내가 새벽까지 참고 인내할 수는 있을까? 라는 의문으로 몹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홈스테이 학생들은 더 이상 케어가 어렵기도 하였지만 학생들 부모를 생각하며 건강한 부모들이 돌봐 주는 집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되어 다 내보내고 우리 가족만의 생활을 시작했는데 뒤돌아보니 이민 와서 처음 몇 달간만 가족끼리 살았지 그 다음엔 지인 자녀가 일 년씩 유학 다녀가기도 하고, 친가와 외가가 방문하고, 끝도 없이 친인척들이 다녀가기도 하고, 또 부모님이 와서 체류하시는 등 거의 우리 가족끼리는 산 적이 없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 이민 삶의 애달픔과 여러 가지로 수고했을 아내를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게다가 암 선고를 받기 전까지 수년간 아내는 매 주일 목사님 식사를 챙겨 드리기 위하여 토요일 새벽까지 음식을 준비하여 왔었는데 아픈 바람에 음식 준비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대부분의 젊은 세대가 그랬겠지만 이민 오기 전 아내의 삶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와 하숙 생활을 했고 졸업 후 무용학원 원장을 하였던 터라 가정 살림을 거의 해보지 않았었기에 교회에서 목사님 식사를 준비하여 달라는 제안에 내심 놀라고 당황했지만 정성을 다하여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반찬을 준비하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고 참 아름다워 보였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우리 가정에 닥친 투병 생활의 시작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많은 상처를 남겨주었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걸까?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하여 대접했고 하숙생 한 명 한 명을 사랑으로 내 자녀처럼 사랑하고 양육한 결과였던 걸까? 아니면 주님께서 우리 가정에 특별한 계획이 있으셨던 걸까? 아내가 이렇게 목사님의 식사를 준비하고 또 교회 차원에서 걸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 봉사까지 지속 가능한 케이터링에 노출된 결과인 걸까?
갑자기 지인을 통하여 우리 가정에 100여 명이 넘는 고등학생들이 있는 기숙사에서 급식업체를 찾고 있는데 우리도 한 번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이 온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는 Catering 업체를 운영하던 상황도 아니었지만 이 찬스를 놓치기 싫어서 아내에게 이거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더니 대답은 완전 싸늘함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직 항암 치료 중이었고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한 끼에 100여 명에다 스태프까지 하면 120여 명, 1일 3식이면 하루에 400여 끼 가까이 만들어 내야하고 게다가 대부분 한국 학생이 아니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유학생들이었기에 메뉴도 다양해야 했고 이런 음식을 준비할 전문 쉐프도 없는데 사실 엄두도 나질 않는 상황이긴 했다. 또한 주변 지인들도 너무 무리해서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는 등 워낙 부정적이고 반대에 부딪혀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솔직히 이게 기회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내도 혹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기회를 주신 건 아닐까 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일은 진행이 되어 우리를 포함하여 일본 업체와 다국적 업체 등 세 업체가 음식을 시연하라고 했고 우리는 준비했다. 우선 음식을 잘하고 좋아하는 지인을 섭외하고 한 끼 시연을 하기 위한 메뉴와 팀을 꾸리고 기숙사에 들어가 퓨전식 한국요리를 준비하여 100여 명의 학생과 기숙사 스태프, 그리고 몇 학교 직원들이 시식을 하였고 그 다음 날은 다른 팀들이 시연하였다. 세 업체의 시연이 끝나고 난 뒤 음식을 먹은 학생과 직원들 전체가 투표를 했고 결과적으로 학생과 학교는 우리의 음식에 손을 들어줬고 우리는 급식비 기준 연간 매출이 100만 불이 넘는 원천 계약을 따냈다.
Biz to Biz
그러나 막상 계약은 땄는데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이 고등학교에서는 우리를 뭘 믿고 급식을 맡겼는지가 우선 미스터리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우리는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주신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무슨 동네잔치도 아니고 일 년 365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돌아가야 하는 기숙사 급식이므로 고도의 숙련된 요리사와 위생사 그리고 영양사까지 갖추어서 작업해야 하는 상식적으로는 케이터링 전문업체가 해야 할 원천 계약을 아무것도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 기숙사 급식 비즈니스는 이민 10년 차를 넘어가는 우리 가정에 변곡점이 되었다. 학원과 홈스테이의 불규칙한 수입에 의존하다가 정해진 기일에 정확히 들어오는 급식비용 입금으로 Cash Flow 가 엄청 좋아졌다. 이것은 두 딸이 기숙사가 있는 사립학교로 진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두 딸은 그 학교가 가장 학업성적과 졸업생 진학 현황이 최고였던 황금기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를 가서 한국에서 의사가 되어 서울대 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거쳐 전문의가 되고 결혼을 한 10여 년간의 역이민 과정을 통하여 우리 가정의 현재를 이루게 되는 큰 그림을 그리신 것이다.
물론 영원할 줄 알았던 급식 비즈니스는 뜻하지 않은 상황으로 그만두게 되었지만 이미 우리 자녀는 한국으로 대학 유학을 떠난 상황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일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나에게 사립대학의 풀타임 컨설턴트로 근무하게 하셨다. 결국은 좀 더 개인의 명예와 봉사가 가능했던 오클랜드 세종학당을 설립하게 하시고 초대 학당장으로 취임하게 하셨다. 이 업무로 인하여 나는 일 년에 2회 내지 3회 이상 한국에 정기적으로 출장을 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이렇게 출장을 가는 기간에 휴가를 연결하여 한국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딸들을 만나 위로하고 격려를 해줄 수 있었다.
이처럼 비록 한 명의 한 끼 식사를 정성껏 준비하며 섬기던 일이 여러 명의 하숙생을 섬기게 하셨고, 거리의 걸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던 결과 이렇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한 봉사와 섬김에 주님께서는 어마어마한 비즈니스를 주시고 이로 인하여 우리 이민 삶의 게임체인저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길갈의 상자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고 과속을 했으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부정적인 면만이 아니고 긍정적인 면이 더 강할 수도 있다고 확신한다. 다만 부지불식간에 느끼지 못하고 지나갈 뿐.
일대일 제자 양육을 받는 과정에서 한 강사가 각자 인생의 길갈의 상자를 만들어 보자고 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요단강을 건넌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 장소를 말한다. 그런데 이걸 현대화하여 나의 삶에 적용해 보라며 매년 첫날에 상자를 하나 만들어 매번 감사할 제목이나 기도의 응답 그리고 주님의 역사하심이 있을 때마다 종이에 적어 이 상자에 넣어 놨다가 연말에 상자를 개봉하여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주님의 역사와 감사와 기도 응답이 있었는지 가족들과 함께 나누어 보면 좋겠단 말씀에 그렇게 하기로 작정했는데 처음에는 상자를 만들었다가 나중에는 기도 수첩에 이 일을 적용해 보기로 하였고 지금까지 실천하는 중이다.
돌이켜 보면 이렇게 해마다 길갈의 상자에 들어 있는 기도의 응답, 주님의 역사하심, 믿기지 못할 기적 등 나에게 있어서 길갈의 상자는 이민의 역사요 주님의 기적이요 자녀 양육의 간증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올해 내 나이가 62인데 인생의 31년은 한국에서 나머지 31년은 뉴질랜드에서 살았으니 딱 “반반치킨”인 셈이다. 옛말로 형용하자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 뉴질랜드 와서 강산이 3번 변한 셈이다. 한 세대를 30년이라고 잡으면 이제 우리의 세대보다는 자녀의 세대가 주가 되는 시점에서 평균 수명 100세 시대에 살게 될 나와 내 아내는 앞으로 30년은 어떻게 준비하여야 하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왔다.
그러나 걱정은 없다. 주님이 계시지 않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