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견뎌내는 선교

수십년 전, 처음 방글라데시를 방문했을 때였다. 다카공항에 도착할 때는 한 밤 중이어서 몰랐는데 떠나오는 날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갠지스강 하류의 무성한 숲에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그렇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하여 인도를 거쳐 방글라데시로 흘러 인도양으로 빠져나가는 갠지스강 하류는 ‘순달반스 Sundarbans’라는 아주 유명한 숲을 이룬다. 그 숲에는 벵골 호랑이도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숲을 이루는 나무 대부분이 맹그로브(mangrove)나무이다.

맹그로브 나무는 내가 목회와 선교를 위해 찾아온 오클랜드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오클랜드 하버 주변의 라군(Lagoon)에도 맹그로브 나무가 빼곡하게 자라고 있다. 오클랜드 시내로 나가는 노스코트 고속도로 주변에는 밀물 시간대에는 맹그로브 나무들이 바닷물에 잠겨 겨우 머리만 내밀고 가쁘게 숨을 내쉬는 모양이다. 바닷가에는 맹그로브 나무만이 아니다. 함초(鹹草), 비치 스비나치(Beach spinach)는 등 다양한 염생식물들이 자란다. 이들의 특징은 짜디짠 바닷물을 견디며 자란다. 소금물에 푹 담겨 절여질 정도인데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자란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 현장도 마찬가지다. 선교사는 마치 염생식물과 같아야 한다. 내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선교 환경을 탓하는 선교사, 목회자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환경이라면 좋겠지만 선교현장은 그리 녹록치 않다. 전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았거나 들어갔다 하더라도 무력해진 인간 광야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도 있다. 그곳이 마치 짜디짠 바닷물 환경 같은 곳일지라도 말이다.

선교사와 목회자는 그런 곳에서도 복음을 들고 복음 때문에 살아있어 오히려 주변환경에 도움을 주는 염생식물 같아야 한다. 선교사와 목회자가 지나치게 물질이나 주변의 평가와 인기에 편승하게 되면 작은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중도에 멈추거나 포기하고 만다.

선교지의 상황은 선교지마다 다르다. 보통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선교지에서는 참으로 놀라운 사역이 펼쳐진다. 내가 속해 있는 선교 SNS에는 오대양 육대주 수백명의 선교사들이 회원으로 있으며 그들의 사역을 듣고 보노라면, 그 각각의 선교사들은 어떤 환경이라 할지라도 견뎌내고 극복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에 감격할 뿐이다.

선교에 있어서 뉴질랜드와 대한민국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선교사 파송 세계 2위의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뉴질랜드는 1960년대가 그랬고, 대한민국은 최근까지도 그랬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중에 교회가 부흥하던 때와 맞물린다. 뉴질랜드도 그렇고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로 교회가 한창 부흥해 나갈 때 선교사역도 최고조에 이르렀고 나라의 발전도 함께 이루어졌다. 교회가 부흥하고 선교에 눈을 뜨면서 나라도 부강해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복음에 열중하고 선교에 눈을 떠서 열정을 다하니 복음과 선교에 필요한 많은 인적, 물적, 영적인 자원을 부어 주셨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보면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코로나 시대를 겪고 난 한국교회는 교회가 어려워졌다고 선교비를 대폭 줄이고 선교정책을 바꾸는 일이 허다하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많아지면서 복음전하는 일과 선교가 교회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거나 잠시 미루는 경향들이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라는 말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당연히 선교 중심이 되고, 무엇보다도 더 우선되는 일이 선교라는 사실을 인정하던 일은 과거가 되어간다. 교회부터 살자는 투다. 교회가 선교를 무슨 교회적 사업 예컨대 건축을 하게 되는 경우, 또는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질 때 제일 먼저 선교를 줄이는 현실이라는 말이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와 선교지가 함께 견뎌내야 할 것이 있다.


비난? 견뎌내라
예루살렘교회가 사도행전 11:1에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첫번째 반응은 ‘비난’이었다.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행 11:2)고 비난했다. 이 말은 예루살렘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였지만 아직도 유대교적 기독교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비난을 견디지 못하면 복음도 선교도 없다.

사도행전 11장에서 이런 예루살렘교회의 잘못된 의식을 고쳐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보라. 5절에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12절에서는 성령으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13절에서는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16절에서는 베드로에게 주의 말씀으로 역사하시며, 17절에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깨닫게 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열심인가?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베드로의 보고를 받고 나서 예루살렘 교인들, 특별히 유대인인 할례 받은 교인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했다는 사실을 보라. 18절은 한 마디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나님께 영광!’ 아닌가? 즉 유대인에게도, 헬라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겸손히 순종한 것이다. 이것을 교회의 의식 변화라고도 볼 수 있지만, 비난을 견뎌낸 결과이다. 의식 변화는 물론 견디고자 할 때 선교는 지속될 수 있다.

핍박? 이것도 견뎌내라
예루살렘의 교회가 핍박을 선교로 견뎌내는 것을 넘어서 이겨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첫번째 핍박은 스데반의 순교로 생겼다. “사울은 그가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교회가 핍박에 좌절하지 않고 이를 견뎌내고 오히려 최초의 외지 선교를 시작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서 지원하면서 교회를 지키고, 평신도들은 흩어져 외지 선교를 함으로써 핍박을 견뎌내어 나갔다.

사도행전 8:5에서는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다. 핍박을 선교하라고 강제로 흩으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평신도들이 외지 선교를 담당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사도행전 8:14에서는 사도들을 사마리아에 파송한다. 사도들만이 예루살렘의 교회에 남아있는 현실 속에서 예루살렘교회는 평신도들이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하고자 내지 선교로 볼 수 있는 사마리아에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성령받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비난과 핍박, 어려운 것이지만 그런 외부적인 환경에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내지 및 외지 선교에 집중함으로써 교회가 살 길을 찾아 나서는 모습을 배워야 한다. 이 말은 전도하며 선교하는 교회를 세상이 쓰러뜨릴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람만 많이 모이는 것이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도 많이 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교를 잘 감당한 교회였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를 하기 위해 우리 교회가 견뎌내야 할 의식은 무엇인가? 교회가 부득불 예산을 절약해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 선교비를 줄였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어떤 여건에 맞닥뜨린다 해도 맹그로브 나무가 짜디짠 바닷물에서도 견뎌내며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처럼 지금은 견뎌내야 하는 시점이다. 예루살렘교회를 통해 이것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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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명균
총신신대원 졸업, 24년째 한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이어가고 있으며 총회세계선교회(GMS) 뉴질랜드지부장을 맡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에는 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성경일독을 이어가는 을 5년째 집필하고 있고 뉴질랜드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교적인 시각으로 다시 보면서 이 이야기를 펼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