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잠시 변압기 만드는 회사에서 변압기의 각종 부품을 가공하는 분야에서 잠시 일을 했었다. 설계부에서 받은 도면을 보며 작업을 하는 중에 가끔은 ‘현장 맞춤’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도면을 그리는 설계사가 책상에서 아무리 정확하게 수치를 산정한다 해도 현장에서 미세한 오차가 발생하여 맞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현장에서 맞게 작업하라는 의미이다.
IT 기술의 힘이 최첨단에 이른 시대에 살고 있는 이 시기에는 그럴 일이 거의 없겠지만, 이런 모습이 단지 산업현장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목회 현장은 물론이고 선교 현장에서는 아직도 이런 시행착오가 계속되고 있다.
현장 맞춤
‘세계 선교’라는 큰 과제 앞에 교회와 선교지망생은 물론 선교단체 등은 불꽃같이 타오르던 시대가 있었다. 그 불꽃이 조금씩 사그라져가는 현실인 것을 숨길 수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선교 현장의 요구를 먼저 살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선교 현장에 대한 연구보다는 단지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나 선교단체의 목적과 이상에 급급했던 것이 사실이다.
선교사는 욕심(?) 그것도 문제라면 문제이고, 달포 전에 한국의 모교인 신학대학원에서 졸업을 앞둔 신대원생이 아내를 폭행한 일로 졸업을 보류시킨 뉴스를 들었다. 그 소식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그 신대원생의 말이 더 충격이었으니, 선교지로 나가 사역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학대학원에서 졸업도 못하고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 길이 막히니 선교지로 나가겠다는 말이다. 자신의 결격 사유가 선교지에서 감추어 보겠다는 셈인가, 감춰지겠다는 것인가?
한국의 일부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한다. 차라리 사명감이 뜨겁고 열정 넘치는 선교사 지망생들이 ‘세계 선교’에 심취되어 자신이 가서 일할 선교지와 현지 사람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전 현장검증 없이 선교지에 상륙하여 방황과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경우는 오히려 낫다. 사전 답사를 해도 실제로 현지에서 사역하는 가운데는 또다른 많은 변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나 기관들이 자기들의 목표나 욕심을 지나치게 강요함으로써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알맞은 선교 방법이나 전략을 활용하여 소신껏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는 선교지 현장의 요구를 겸허하게 듣는 것에서부터 선교를 시작해야 한다.
골리앗과 다윗
다윗과 골리앗을 선교 측면에서 이해해 본다. 다윗을 선교사 혹은 파송 교회나 단체라고 보고, 골리앗을 선교지망생이나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교회가 맞닥뜨려야 하는 선교지와 그곳의 현실로 보면 어떻겠는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선교지에서 만나는 사역과 문제들은 정말 골리앗과 같이 거대하여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에 비하면 선교지망생과 파송 교회는 다윗과 같이 누구의 눈에 보기에도 ‘어린 소년’의 모습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삼상 17:33)
주일 하루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드라마 속에서 영상 한 장면이 지나간다. 아무것도 없이 오직 복음을 들고 조선 땅에 들어왔던 선교사 이야기, 그들에게 전통적인 불교, 유교 사상은 물론 쇄국정책까지 펼치며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조선은 분명 골리앗과 다를 바 없었다. 그에 비하면 선교사들은 소년 다윗과도 같았다.
조선 땅에 들어왔던 선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이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장벽들을 헤치고 복음을 펼친 가운데 대한민국은 복음으로 활짝 핀 꽃과같이 아름다운 나라, 풍성한 열매가 넘치는 나라가 되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에는 ‘위대한 다윗’이 아니라, 누구의 눈으로 보더라도 ‘소년 다윗’은 연약하고 작은 존재로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다윗은 적어도 골리앗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될 정도요, 아무 능력도 없어 보이는 그래서 보잘것없는 존재 자체로 싸움에 나갔다. 능력으로 따질 때 골리앗과 다윗은 견줄 수 있는 대상이 이미 아니다.
한국의 불교, 유교 문화, 단군신화, 그리고 뉴질랜드의 마오리 문화 속에 있는 종교적이고도 다양한 신화는 물론 그들의 삶은 마치 거대하여 결코 정복할 수 없는 골리앗처럼 단단했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모든 환경에 두려움 없이 맞서고 감당했던 다윗은 ‘위대한 다윗’이 아니라 ‘소년 다윗’의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삼상 17:36)
싸움하는 자는 누구와 싸울 것인가, 왜 싸워야 하는가, 무엇으로 싸울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목적과 이유와 대책이 있어야 한다. 소년 다윗은 골리앗을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으로만 보았다. 그의 능력, 그의 외적인 모습에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것의 방해물을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소년 다윗’이 알았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도무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조선인들의 마음이 열리고 마오리들의 마음을 열어젖힌 것은 하나님의 그들을 사랑하시는 은혜였다. 선교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어렵고 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즉 이 시대의 골리앗을 마주할 때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보다는 먼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언제나 우리 눈에는 날마다 ‘싸움을 돋우는 골리앗’ 같은 문제와 어려움만 보일 때가 많다. 믿음을 사용해야 할 때인데 우리의 믿음은 어디 있는가?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7:37)
그리스도인만큼 ‘겸손과 사랑’을 말하는 사람도 드물다. 겸손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겸손은 소년 다윗과 같은 심정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의지하는 자에게서 나온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사랑을 많이 말한다. 그러나 받은 사랑만큼 하나님의 나라와 일에 헌신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성과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우리는 교회를 섬기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가르치고, 헌신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얼마나 많은 이웃과 민족과 족속과 나라가 있는가? 성도가 ‘위대한 다윗’을 꿈꾸고 있을 동안에도 ‘골리앗’은 기승을 부린다. 성도가 ‘소년 다윗’으로 주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골리앗의 세력을 꺾으신다. 하나님의 큰일인 선교를 누가 감당하겠는가? 바로 나와 당신 같은 ‘소년 다윗’이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하다.
선교한다는 것은 우리가 골리앗을 만나는 것과 같은 험난한 일이다. 아무리 힘을 써도 도대체 어떤 결과가 있겠는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골리앗 앞에 서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여러 가지 사명 중에서 선교를 위한 교회의 역할은 절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