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세 남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마르다, 마리아 자매와 그들의 오빠인 나사로입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자 두 남매는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였는데 즉시 가지 않으시고 이틀을 더 유하셨고 그동안 나사로는 죽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5절)고 하시며 주께서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바로 가지 않고 죽기까지 기다리신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제자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게 하려 함일까요? 말씀을 통해 부활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부활의 믿음은 현재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서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온 마르다에게 주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십니다. 그때 마르다의 대답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대답에 대하여 주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마르다와 주님의 대화에서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고 그렇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
여기서 다시 살리는 것이 부활을 의미하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마르다가 말한 것과 주님의 말씀과의 차이는 시제에 있습니다. 마르다는 미래를 말하고 있고, 주님은 현재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바로 부활이고 생명이라는 것이고 그 주님을 지금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미래의 어느 순간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영생은 내가 죽은 다음에 얻게 되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주어졌고 지금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이미 우리 안에 부활과 영생이 잉태되었고 그것이 자라나고 있으며 때가 되면 온전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마르다의 모습은 임신을 했는데도 잉태된 아기가 안 보이니까 “나에게는 생명이 없어요. 아기가 없어요. 나중에 그냥 주어질 것이에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과 영생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믿고 현재의 부활 신앙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믿음은 틀을 허무는 믿음입니다
마르다에 이어 예수님께로 나온 마리아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주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아쉬움과 섭섭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만일 죽기 전에 주님께서 오셨다면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는 너무 늦었네요. 어떻게 주께서 이러실 수가 있나요?” 하면서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며 절망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와서 주변에 서 있던 유대인들도 마리아와 함께 웁니다.
이렇게 우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33절에 보면 주님은 그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엠브리마오마이’)는 ‘분개하다’, ‘억울함으로 한숨짓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38절에도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는 말을 들으시고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마리아와 유대인들에게 분개하고 억울함으로 한숨을 지으셨을까요? 그들의 믿음이 자신의 한계와 틀 안에 갇힌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죽기 전에 살리는 것은 가능할 수 있지만 죽고 나면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믿음의 기준이 예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 예수님이라도 이것은 가능하고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자신들만의 지식과 경험의 틀에 예수님의 존재와 능력까지 그 안에 넣고 판단하는 믿음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39절 이하에도 나옵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자 27절에서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했던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왜 돌을 옮기라고 하십니까?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내가 그렇게 말하였는데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아직도 믿지 못하느냐?”는 안타까운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까?
주님이 정말 마음 아파하며 애통해하신 것은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에게 진정한 부활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앞에, 그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에 바탕을 둔 믿음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을 애통해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은 우리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생긴 믿음의 틀, 한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준을 ‘내’가 아니라 ‘주님’께 두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믿음은 회복의 믿음입니다
부활은 단지 이 땅에서의 삶이 연장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그 선하고 아름답고 온전한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사람이 살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 먹기에 좋은 나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우리의 혼적인 부분 즉 생각과 정서를 위한 것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는 우리의 육신을 위한 것이며, ‘생명나무’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종종 원수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나무였고 또한 마귀를 막는 안전장치였습니다. 먹을 수 있지만 먹지 말라고 하신 이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사람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고 우리 사람에게 있었던 ‘보시기에 좋은’ 선하고 아름답고 온전한 모습들이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이런 깨어지고 왜곡된 모습을 원래의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몸이 온전하고 아름다운 몸으로 회복됩니다. 범죄함으로 인하여 공중(땅의) 권세를 잡은 마귀에 붙들려서 죄와 사망에 묶이고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우리 몸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맞는 몸으로 변화되어 더 이상 죄가 없고 사망이 없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영의 세계에 맞는 온전하고 아름다운 몸을 입게 됩니다.
부활은 죄로 인해 일그러진 우리의 성품을 주 예수의 선한 성품으로 회복시킵니다. 인간에게 들어온 죄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면서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끼겠다는 그 선한 성품을 타락케 하여 그 여자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남 탓을 하게 만들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정죄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타락한 성품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인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시기하여 돌로 쳐서 죽입니다. 이렇게 타락하고 악하여진 인간의 성품이 다시 깨끗하며 선한 주님의 성품으로 바꾸어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또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회복됩니다. 부활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가로막던 모든 것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게 합니다. 죄와 사망이 사라지고 악한 영들이 사라지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사라지게 되어 즉시 하나님과의 신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하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그대로 우리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아름답고 온전하고 선한 회복이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씨앗이 예수 믿는 우리 성도들 안에 심어졌고 또 자라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왜곡된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오늘도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