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교회

손기철 목사<오클랜드한인교회>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사도행전 6:1-7)

세상에 ‘원망’이 없었던 시대가 있었을까요? 성경의 기록을 보더라도 ‘원망’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 인류 역사에 끊임없이 나오는 ‘문제’입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원망은 ‘못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한다’는 뜻입니다. 원망은 무의식적인 감정 표현으로 비록 나쁜 의도가 없어도 주로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에게 표현된 원망은 가정, 직장, 교회 등의 공동체 안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했지만 ‘원망’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원망의 문제는 어디에서 출발되었을까요? 그것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헬라파와 히브리파 유대인) 간의 갈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후 해외에 흩어져 살며 헬라 언어와 문화에 익숙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에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계속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언어와 사회 문화의 배경을 가졌기 때문에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뉴질랜드의 상황과도 같습니다.

이들에게 생겨난 구체적인 내용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구제의 문제’였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과부들이 매일 음식을 받는 구제에서 빠지게 되자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1절). 만일 이런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면 불평과 원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망은 우리를 실망하게 만들고 서로 비난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게 만들고 결국 나 자신과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사단의 공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원망의 문제를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첫째, 사도들은 ‘내 탓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원망의 문제를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방법은 음식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렇게 접근하지 않습니다. 본문 2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서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표준새번역 성경)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너희’가 아닌 ‘우리’가 옳지 않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도리어 “당신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내가 충분히 기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련하게 그 일을 혼자 다 하려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두 내 탓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불평과 원망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 많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사도들은 ‘나는 죽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내 탓이요!’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옛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섬겼는데…”라고 말하며, 불평과 원망의 눈으로 타인의 잘못만 보게 됩니다. 사도들은 ‘내 탓이요!’라고 고백함으로 원망과 불평의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았습니다.

믿음의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더 이상 타인에게 원망의 화살을 쏘지 않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려는 옛 자아가 죽었기 때문에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며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입은 자의 삶입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릴 만한 원망, 불평이라는 시험 앞에서 오늘 본문 속 사도들은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인생으로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혹 불평하고 원망할 만한 상황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하십시오. 기도 가운데 하나님 앞에 모든 상한 마음을 털어놓으십시오.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우리의 더럽고 냄새나는 마음을 받아주셔서 깨끗하게 비워주실 뿐만 아니라 정결한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을 넣어 주실 것입니다.

둘째, 사도들은‘일꾼’을 세움으로 원망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일과 구제 사역을 다 감당하느라 바빴던 자신들의 연약함을 고백했고, 3절에서 이제 일꾼들을 세워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전적으로 맡깁니다. 그리고 일꾼을 세우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일꾼을 세우는 첫 번째 원칙은 사도들이 주도적으로 일꾼을 뽑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이 함께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소수의 일꾼들이 일하지만 그들을 세운 교인 모두가 그 일에 동참하는 의미가 있으며, 교회 공동체는 세워진 일꾼들이 맡은바 사역에 열심과 충성을 다하도록 그들을 믿고 세워주는 분위기를 동시에 만들어 냅니다.


일꾼을 세우는 두 번째 원칙은 본문 3절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돈이 많거나 높은 지위에 있어서 소위 말하는 영향력이나 힘 있는, 잘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칭찬받는 사람이란 ‘증인’을 뜻하는 헬라어 ‘마르티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증인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경험한 사람으로서 목숨을 걸고 증언을 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수준을 뛰어넘어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끝까지 증거하는 스데반 집사와 같은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원칙으로 동역자들을 세우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동참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동역자인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가정과 학교, 일터 등 모든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우리는 내세울 것 없는 모습일지라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존귀한 자로, 소중한 자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섬기는 자로 친히 세워주십니다. 우리가 지금도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때 질그릇과도 같은 우리 인생 속에 보배로우신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들려오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때때로 실망하거나 낙담하게 되고, 혹은 동일하게 다른 사람을 원망하며 비난하며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혼자 있으면 외롭기에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지만 상처받기를 두려워해서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내려오는 용서와 사랑을 우리의 빈 가슴에 채우십시오. 우리 안에 있던 원망과 불평이 감사와 기쁨으로 바뀌며, 움츠렸던 몸과 영혼이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메말랐던 우리의 영혼에 새 힘과 능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용기있게 ‘내 탓이오’라고 고백함으로 공동체를 살리며, 한 영혼을 품고 섬기는 주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더욱 귀하게 사용되길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