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통한 구원과 섭리.신앙과 삶.죽음과 부활 설명해

‘전통적인 신앙’은 건전한 신학과 올바른 성경 이해로 성찰할 필요가 있어

또 다른 삶의 이야기: 신학
‘기독교 신학’이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학문으로서 신학은 약 2000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러한 기간만큼 다양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현재도 다중적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더욱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신학(Theology)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신’(theos)과 ‘학문’(logos)이라는 그리스어의 결합으로, 2세기 후반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스가 이교도의 신앙 체계인 ‘뮈톨로기아(Mythologia)’에 맞서 ‘그리스도교의 신 이해’라는 용어로‘테올로기아(Theologia)’를 내세우며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신에 대한 이론’, 좀 더 확대해 본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연구하여, 하나님에 대해 인식한 것”을 학문적인 체계로 서술한 것으로 신의 참된 존재와 신의 창조 역사 등을 성서를 통하여 탐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러한 정의는 사전적인 규정이며, 실제로는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 집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약 B.C 1500년경에 기록되었을 모세 오경을 시작으로 히브리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의 계승인 구약성서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초기기독교 공동체에서 형성된 신약성서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러한 신·구약 성서를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초기기독교 사상가들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론을 존재론적 언어를 빌려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통 아래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발전시킨 장구한 역사적 산물로 아주 독특한 ‘하나님에 관한 이론’입니다.

조금 간략하게 표현한다면 히브리인들의 구약성서의 ‘종교적 신 개념’ 과 초대 교회의 신약성서를 고대 그리스의 ‘존재론적 신 개념’ 언어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기독론’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때문에, 다분히 종교적이며 존재론적인 하나님에 관한 이론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서양문명의 정신사를 크게 그리스적인 것과 히브리적인 것, 두 가지 본류로 구분합니다.

이 두 사유방식은 서양의 역사를 이끌어 온 두 축으로, 그것들은 서로 충돌과 조화를 이루면서 오늘날 서구사회의 사상과 문화를 이끌어 왔습니다. 두 사유방식의 복합물로서 서양사상을 대표하는 것이 기독교이며 기독교의 근간은 성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약성서에서 이 두 사유방식은 서로의 이질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복합체로서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성서가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될 때마다 그 나라 고유의사유방식이 첨가되는 것과 같이 어쩔 수 없이 겪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히브리적 사유)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성서를 이해하는 유효하고 적절한 방법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서 초기기독교는 유대교의 틀 안에서 태어났고 예수와 제자들은 아람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 표상 세계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헬레니즘 세계로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이 이동하였고, 신약성서 기자들은 유대인으로서 헬레니즘의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사유를 헬레니즘의 언어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록 당시부터 성서는 히브리적 사유로부터 일탈할 수밖에 없는 가능성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신약성서가 그리스적 사유형식을 빌어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그리스어가 공용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바울 서신의 경우 바울의 상황적 요건, 즉 그리스 문화권에 대한 선교의 목적도 있었음을 그의 서신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 철학에 근거한 서구적 사상과 신앙의 전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서의 본래 의미로부터 이탈되는 결과를 낳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이 가능해집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신약성서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여러 가지 애매함과 혼란을 겪는 이유가 이러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초기기독교가 형성되던 로마 제국은 강력한 그리스-로마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주변국에 비해 군사와 경제적 우위뿐 아니라, 철학, 법, 예술, 종교 등에서도 높은 수준의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특별히 종교적으로는 황제 숭배를 비롯한 다신론적 경향을 띠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는 삼위일체에 바탕을 둔 강력한 유일신 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초기기독교 신학은 무엇보다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하나님에 대해 ‘변증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섭리에 대해, 신앙과 삶에 대해, 죽음과 부활에 관해 설명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기독교가 공인받기 전 박해의 시기 동안 신학 작업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에 제시된 신학의 방향은 그 후 기독교 역사에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에서‘몸에 밴 신앙’(fides in corpore)으로
안셀무스(Anselmus)의 정의에 따르면,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을 알고 계실까? 이런 질문은 결코 불경한 것이 아니지요.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던질 수 있고, 또 던져야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합리성과 타당성을 요구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강요하는 것을 거부하고, 합리적 이해를 요구합니다. 이는 삶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 사건을 마주하면 ‘설명’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학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합당한 이해를 마련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신학이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루는 주제와 내용이 ‘신’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학문의 대상은 우리 인식과 지각 내에 있는 유한한 것들이지만, 신학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다룹니다. 여기서, ‘신학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또는 ‘신학의 원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신학은 연구 대상이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연구 주제나 내용을 계시(Revelation)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신학의 출발점이면서 기본 원리는 계시입니다. 계시란 우리로서는 알 수도 없고 감지할 수도 없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거나 알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계시가 하나님에 대해 알기 원하는 모든 것을 백과사전처럼 나열해서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경과 각자의 삶을 통해 어느 한 부분만 알려주십니다. 예를 들면, 계시는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셨듯이 하나님에 관한 내용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양으로 전달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만 알려 주십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계시는 원래 하나님에 관한 초월적 내용이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인지할 수 있도록 이성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과 전적인 수용(받아들임), 둘 다 사용해야 합니다. 이를 간과하면 계시를 이성 안에 가둔 채 하나님과 성경과 신앙생활 전체를 잘못 해석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때론, 우리의 이성을 비롯한 오감에 와닿도록 인간의 역사를 통해 알려주시고, 필요하다면 인간 앞에 현현하거나 기적을 베푸십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야만 우리가 계시의 참다운 내용을 이해하고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으나 대표적으로 네 가지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우선하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공부함으로 신을 이해하고, 두 번째는 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공부함으로, 셋째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마지막으로 개인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갖춘 틀 위에 이성과 경험을 통해 깨달아 가는 게 순서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중요한 점은‘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신학)은 언제나 ‘몸에 밴 신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곧, ‘몸에 밴 신앙’은 교회 안에서 배우고 익힌 교회의 문화와 전통들이 그리스도인의 관점(기준)과 신앙의 틀(내용) 그리고 언행 안에 형성된 것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은 교회의 문화와 전통을 통해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며 교회와 믿음 생활은 이런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에 밴 신앙’은 교회를 통해 배우고 익힌 믿음의 틀(내용)을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신앙은 형식적이든 비형식적이든, 계획적이든 비 계획적이든 교회 안의 셀 수 없이 많은 믿음의 활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의식하든 못하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에서 비롯된 믿음의 틀과 관점과 언행들이 교회 안과 일상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전달되고 보여지는 것을 ‘몸에 밴 신앙’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몸에 밴 신앙’을 ‘교회의 전통’ 또는 ‘전통적인 신앙’이라 칭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일과 진로와 다양한 문제 등을 결정할 때 신학과 전통적 신앙의 틀에 따라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매일 대부분의 결정은 ‘몸에 밴 신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에 밴 신앙’은 주로 교회의 문화와 전통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건전한 신학과 올바른 성경 이해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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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조
총신대 신대원 졸업. 세계선교교회 담임. “언어는 존재의 힘이다”는 통찰을 빌려 신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언어로 하나님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삶의 귀중한 자리를 확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