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만나면 변합니다

이종수 목사<네이피어시온교회>

19세기 캠브리지 대학 신학 과목 시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첫 기적에 대해 논하라는 답안지를 놓고 모두가 답을 적기에 정신이 없는 그때에 한 청년은 그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시험 시간은 거의 다 마쳐가는데 넋을 놓고 창밖만을 바라보던 청년을 보다 못한 감독관은 이 청년에게 마지막 주의를 줍니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백지만을 내놓는다면 학사경고가 따를 것’이라고 말입니다.

종료 시간이 거의 다 되자 한없이 창밖만을 바라보던 이 청년은 펜을 들고 한 문장을 휘갈겨 쓰고 밖을 나가버립니다. 놀랍게도 이 한 문장의 답안은 만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시험지를 제출한 학생은 영국의 3대 낭만파 시인 중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입니다. 그리고 그가 제출한 답안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이 그 창조주를 보고 얼굴을 붉혔도다(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우습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글입니다. 맹물이 창조주를 만나니 최고의 와인이 된 이 사건처럼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제대로 만나면 그 인격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무의미한 삶에서 가치 있는 삶으로, 자신밖에 모르던 인생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인격으로 바뀌지요.

문제는 ‘내가 예수를 제대로 만났느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생활이 변화되는 것이지요. 나 자신만의 행복만을 추구하던 자아가 이웃의 행복에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내 할 말만 하던 입이 닫히고 이웃의 소리에 귀가 열리게 됩니다. 째려만 보던 찢어진 눈이 동그랗게 커집니다. 관심조차 없던 이웃이 보이고 이웃의 형편을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비난과 비판의 시각에서 공감과 공동체의 시각이 생기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을 하다가 자신도 틀릴 수도 있구나!’ 하는 겸손한 마음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말과 행동이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지요.

성경은 이러한 변화를 성화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인격적 변화를 말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사실 이 일(성화의 과정)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나 전도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의무이나 이 일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라디아서 6:3)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얼마나 잘 속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은 외식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사람 하나를 데려다 앉혀 놓고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들어 놓는다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태복음 23:15)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인격이, 생활이, 삶 전체가 변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다 이 변화를 겪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훈과 가르침을 자신의 삶의 기준과 목적으로 삼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제대로 만난 사람은 분명코 이 변화를 경험합니다. 돌 같은 마음도 말씀에 부딪히면 부서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예레미야 23:29)

오늘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이웃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원인을 초래한 것은 예수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결과입니다. 예수를 알지만 그분의 인격은 알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그의 가르침은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분이 사랑한 이웃을 사랑하는 일엔 관심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런 믿음을 구원받는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제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없는 제사, 사랑없는 제물을 원치 않는다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혹시 나의 신앙의 열심에 형제와 이웃을 돌아보는 일은 결여되어 있지 않는지 말입니다.

무엇이 참된 예배이며, 무엇이 참된 신앙일까요? 무엇이 진짜 예수를 만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일까요? 저는 그 답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드리는 예배이고,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가진 믿음을 참된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는 상관없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일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것이 교회 안이든 밖이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그 누구일지라도, 또 그 사람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더라도 그 한 사람을 사랑하려고 몸부림치며 애쓰는 것이 참된 믿음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이 되지 않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6-48)

아직도 이것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습니다. 그래도 물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언젠간 내 오른편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편 뺨을 돌려줄 수 있는 수준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내 염장에 못을 박고 내 등에 칼을 꽂는 원수라도 축복할 수 있는 위치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만난 자의 정확한 모습입니다. 아직 멀었으나 그래도 그 길을 가시는 여러분 모두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