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야기 “나의 그일라는 어디인가’’

출처 : 책‘왕이 된 양치기’본문 중 각색/규장출판사(2019)

사울을 피해 유대 광야로 들어간 다윗은 아둘람 굴로 숨어들게 된다. 당시 다윗 수하로 약 400여 명이 모여들었고 이들의 대부분이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 이었다. 한 마디로 사울 정권으로부터 불합리한 처사를 경험한 이들이었던 것. 어느 날 그들의 거처로 긴급한 첩보가 들어온다.

블레셋인(Philistine)들이 그일라(Keilah)들의 곡식을 약탈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다윗은 전략적 요충지에 사는 그일라 주민들이 당하게 될 고초를 생각하니 고민이 깊어졌다. 가까이에서 모르는 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었다. 고뇌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자 기다렸다는 듯 그일라 성을 도울 것을 하나님께서 명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다윗은 출전을 종용하고 부하들은 그 결정에 강하게 반대한다.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사무엘상 23:3)”

부하들의 반대는 하극상(下剋上)이 아니다. 합리적인 반대이다. 도망자 주제에 어떻게 남의 어려움을 도와 전투를 벌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어쩌자고 그런 다윗에게 그일라를 도우라고 명하시는 것일까? 타인을 돕는 일은 일단 나부터 잘살고, 이후에 남는 여유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입에 풀칠만 겨우 하는 신세에 무슨 ‘정의’이며 ‘봉사’인가?

일본에서 그림 전시회를 연적이 있다. 일전에 신문에 연재했던 ‘바리스타로 오신 예수’라는 주제의 칼럼에 삽입된 그림들로 구성된 개인전이었다. 전시장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아와주었고 호응해 주었다. 작가 입장에서 뜻깊은 경험이었다.

어느 날 전시장에서 내 그림을 오랜 시간 감상하던 한 일본 분이 찾아와 그림 작업을 의뢰했다. 나는 당시 꽤 비싼 제작 비용을 제시했는데 그분은 흔쾌히 비용을 받아들였다. 정말 궁금했다.

낯선 외국인에게 적지 않은 비용의 그림 작업을 의뢰하는 이분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 알고 보니 그분은 건물을 소유하고 계신 ‘건물주’였다(조물주 다음으로 높다는). 살다 보니 일본 건물주에게 그림 의뢰받는 날도 있다며 고급 차를 타고 돌아가는 그분을 배웅했다. 거금을 받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할렐루야!

다음 날 아침, 묵상과 기도 중 나지막이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그림을 팔지 말고 그냥 선물해라’ 이런! 난처한 주님의 음성이다.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몇 번이고 고개를 저으며 되물었다.

‘하나님! 저의 형편을 아시지 않습니까! 난 누굴 도울 만한 처지가 아닙니다. 가난한 예술가가 무슨 여유가 있어서 그런 호의를 베풉니까! 더구나 의뢰인은 건물주 아닙니까?’ 마치 다윗의 부하들이 항변하듯 하나님께 항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깨달음이 왔다. 형편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세운 기준일 뿐, 모든 이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생각해 보니 그랬다. 누굴 도울 형편이 된다는 기준은 과연 무엇이며 누군가를 도울 형편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평생을 기다려도 그런 때가 오기는 할까? 지금 도울 수 없다면 앞으로도 도울 수 없다는 뜻 아닐까?

결국 순종했다. 조금은 툴툴거리며 그림을 포장했다. 그리고 의뢰인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서로 돈으로 주고받지 말고 이 기회에 친구가 되자고. 그리고 내 가장 친한 친구인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다고. 의뢰인은 내심 좋아하며 당신이 내가 처음 알게 된 기독교인 친구라 말했다. 자신의 건물에도 교회가 들어와 있다며. 의도치 않게(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그 교회와 나와 건물주가 연결된 것이었다.

돈을 받았으면 그 역시 나름 좋았겠지만 그와 나는 소비자가와 판매자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선물함으로써 그와 내가 친구가 되고 이후로도 수년간 SNS로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으니, 그와 하나님과도 연결점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따져보면 하나님의 계산이 옳았다. 늘상 그래왔지만…

그렇다고 내 안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도와야 할 때면 다윗 부하들의 소리와 직면한다. ‘도망자 신세에 무슨 그일라까지 가서 도울 생각을 하냐! 가난한 예술가 주제에 누굴 돕겠다며 호들갑이냐!’

하지만 형편이나 현실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내적 음성도 동시에 들리곤 한다. ‘일어나 가라! 가서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라!’

당신은 어떤가? 지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그일라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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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용욱
단국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업. 기독교 출판작가, 예술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커피’와‘예수님’으로 기독교적 사색을 담은 글을 연재하고 있다. 글쓰기를 배운 적도, 신학 학위를 받은 적도 없는데 12년 째 신앙서적 내고 있는 이상한 평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