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는 미국 작가 오 헨리(O. Henry)가 1907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수(Sue)와 존시(Johnsy)는 화가지망생이다. 둘은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뉴욕의 허름한 공동화실에서 같이 살고 있다. 어느 날 존시가 폐렴에 걸렸다. 가뜩이나 심약하고 예민한 성격의 존시는 폐렴으로 인해 부정적인 생각에 꽉 사로잡혀 삶에 대한 용기를 잃어간다.

수는 그런 존시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원래 심지가 굳고 강인한 수는 룸메이트가 병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용기를 주며 따뜻하게 간호해준다. 수는 아래층에 사는 베어먼(Behrman)이란 노인을 자신의 그림 모델로 쓰고 있었다. 어느 날 수는 그에게 존시의 폐렴 얘기를 하게 된다.

베어먼 노인 역시 옛날엔 화가였다. 평생 무명으로 살아온 끝에 이젠 술주정뱅이가 되고 말았다. 삶이 팍팍해 그가 겉으론 까칠하고 퉁명스러워 보여도, 진짜 속 모습엔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었다. 또한 그는 화가로서 언젠간 걸작을 꼭 그려보고 싶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수가 베어먼 노인에게 들려준 존시의 상태는 참으로 우울한 것이었다. 침대에 누운 존시가 옆집 담벼락의 담쟁이넝쿨 잎들이 하나씩 둘씩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단다. 마지막 잎새까지 떨어지면 자신도 죽게 될거라면서….

비가 억수같이 왔다. 이제 모든 잎새가 밤새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존시도 죽는다. 베어먼 노인은 존시가 삶의 끈을 놓지 않도록 밤 중에 담벼락으로 가 아무도 몰래 마지막 잎새를 그려 넣는다.

존시는 비 온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은 마지막 잎새를 보며 마침내 희망을 회복하고 기력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 잎새를 그리며 비를 심하게 맞은 베어먼 노인은 폐렴을 앓아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렇지만 마지막 잎새는 베어먼 노인이 평생 꿈꾸어온 걸작이 되었다.

묵상과 교훈
이 작품에서 마지막 잎새는 희망의 상징이다.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존시에게 마지막 희망의 보루가 되었던 담쟁이넝쿨 잎. 생명과 죽음의 길을 가르는 이정표와도 같았던 그 잎새는 과연 오늘날 우리의 무엇과 견줄 수 있을까?

생각건대, 배금주의 또는 물신주의로 물든 세상 속에서 마지막 잎새 노릇을 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돈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통장의 마지막 잔고가 사라지면 난 죽는다고 느끼는 절박한 마음이 침대에 누운 존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의 가치가 중한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나, 그렇다고 돈이면 못할 것이 없다는 식의 물질만능주의는 성경의 가르침과 근본적인 궤를 달리한다.

성경에도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한 인물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8장에 등장하는 시몬이란 자의 얘기다. 14절 이하를 보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내려보냈다.

두 사도가 내려가서 사마리아의 성도들을 위해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하니 성령이 임하였다. 이에 마술사 출신의 시몬이란 자가 사도들에게 돈을 내밀며 그 권능을 자기에게도 달라고 청한다. 이 해괴한 짓을 보고 베드로가 시몬을 향해 일갈하는 말이 20절에 나와 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돈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에 불과하다. 어떤 경우에도 그 위치가 바뀌어선 안 된다. 예수님이 그 점을 엄중히 경고하셨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누가복음 16:13).

현실적으로 돈이 생과 사를 가르는 힘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돈에게 우리 인생의 마지막 잎새 역할을 맡겨선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한다.

그렇다면 우린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하는 것일까?
이 소설을 읽는 많은 독자에겐 존시가 담쟁이넝쿨의 잎새 따위에 생명의 희망을 걸고 있는 모습이 어리석게 여겨질 것이다. 사실 성경이 전하는 복음도 그러하다. 세상의 눈으론 2천 년 전에 죽은 이스라엘의 한 청년, 곧 예수에게 생명의 길이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이 어리석게만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절대 진리의 성경은 복음의 모든 영역에서 일점일획도 물러서거나 타협하지 않는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와는 전혀 다르게, 복음은 비바람이 불면 떨어지거나 그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이 일부러 그려 넣어야 하는 연약한 대상이 결코 아니다.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단언하신다. 그것이 복음이다. 복음의 절대성은 “스스로 있는 자”(출애굽기 3:14)이신 하나님의 권위가 자증하고 있다. 마가복음 1:1 말씀이 선언하는 대로, 인류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으로 그 길이 열렸던 것이다.

성경의 눈으로 이 작품을 읽으면 독후감의 격이 달라진다. 베어먼 노인의 이야기가 특히 그렇다. 그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리게 한다. 또 그 죽음을 대가로 회복된 존시의 생명은 예수 안에서 성취된 성도의 구원을 연상케 한다.

존시가 다시 살아났다고는 하나 언젠간 다시 죽게 될 몸이다. 그러나 예수의 구원은 이 땅에서의 일시적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있다. 디도서 1:2 이 그 점을 설명한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처럼 소설조차 성경의 그릇에 담으니 한낱 담쟁이넝쿨에 붙은 잎새마저 영생의 희망으로 한껏 승화하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베어먼 노인의 헌신은 놀라운 반전을 이루어 독자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준다. 베어먼은 고린도후서 6:9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평생 무명화가에 불과한 술주정뱅이 신세였으나 마지막 잎새를 그려냄으로써 존시의 생명을 살린 걸작의 화가가 되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고린도후서 6:9)

우린 그러한 베어먼 노인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맡는다. 베어먼이 그린 마지막 잎새는 존시란 한 생명을 살렸다. 우리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자. 의외로 많은 이들이 실패와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지금도 제2, 제3의 존시가 되어 죽음의 문턱에서 방황하고 있다.

혹 그들 중에도 마지막 잎새를 갈망하는 이가 있을까? 기회가 닿는다면, 나 역시 존시와 같은 처지의 누군가를 살릴 수 있을 헌신에 쓰임 받고 싶다.

그 소망을 마음에 품으니 절로 스스로를 가만히 되돌아보게 된다. 과거의 추억이나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라, 지금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피어나고 있을까? 그 누구라도 내게서 생생한 예수의 내음만 맡을 수 있다면, 그의 인생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단번에 옮겨질 수 있을 텐데…

고린도후서 2:15 말씀을 읽으며, ‘마지막 잎새’의 소설예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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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연세대정외과 졸업, 코람데오 신대원 평신도지도자 과정 수료하고 네이버 블로그 소설 예배를 운영하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조건도 구원에 덧붙여져선 안된다는 메시지를 어른이 읽는 동화의 형식에 담아 연재해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