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의 “적과 흑”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나뉜 사회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싸워서라도 타파해야 마땅하다. ‘적과 흑’의 쥘리앵 역시 이에 맞서 싸웠다. 마지막 재판정에선 목숨을 내놓고 부조리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쥘리앵의 삶엔 그것만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자기 부조리 내지 비윤리적인 모습이 너무 많이 섞여 있었다.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Stendhal)이 1830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적과 흑’(The Red and The Black)은 사회 정의도 중요하고, 개인적 성취도 필요하지만, 그 목적이 모든 과정을 정당화시켜주는 건 아니라는 엄중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시골 제재소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쥘리앵 소렐(Julien Sorel)은 라틴어 성서를 모두 외울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가졌지만, 평민인 그에게 군복(적, The Red)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지 않았다. 그에겐 일개 하급귀족에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희망이었으나, 당시 나폴레옹의 시대는 몰락하고 왕정으로 이미 복귀된 상태였다.

궁여지책으로 쥘리앵은 마음에도 없는 신학을 공부해 또 다른 출세의 길인 사제복(흑, The Black)을 입고자 했다. 쥘리앵은 뛰어난 라틴어 실력 덕분에 레날 시장 (M. de Rênal)의 아이들을 위한 가정교사가 되었다.

야심많은 쥘리랭은 그 집에서 레날 시장의 부인(Mme. de Rênal)을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면서 그녀를 출세의 방편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쥘리앵은 할 수 없이 그 곳을 떠나 브장송의 신학교(the Besancon seminary)에 입학했다. 거기서 교장인 피라르(Pirard) 사제의 인정을 받은 쥘리앵은 그의 추천으로 파리에 있는 라 몰 후작(Norbert de La Mole)의 비서가 된다.

쥘리앵은 콧대높은 후작의 딸 마틸드(Mathilde)를 만나는데, 도도한 여인을 다루는 수단으로 짐짓 사랑의 줄다리기를 벌인다. 마침내 쥘리앵은 마틸드의 마음을 얻으면서 완전히 무릎을 꿇리는데 성공했다. 마틸드는 쥘리앵과 결혼하길 원했고, 딸의 임신을 안 후작은 할 수 없이 두 사람의 결혼에 동의한다.

그러나 쥘리앵의 과거 행적을 고발하는 레날 부인의 편지가 라 몰 후작에게 전해지면서 그의 야심은 수포로 돌아간다. 마틸드와의 결혼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려던 쥘리앵은 그 꿈이 좌절되자 격분하여 레날 부인을 권총으로 쏜다. 다행히 레날 부인은 가벼운 상처를 입는 데 그쳤다.

그러나 쥘리앵은 법정에서 그 총격에 살인 의도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았고, 이에 더해 법정에서 귀족사회의 부조리까지 정면으로 비판해 사형 판결을 받는다. 레날 부인이 감옥으로 쥘리앵을 찾아와 옥바라지를 한다. 마침내 자신이 레날 부인을 진정으로 사랑했음을 깨달은 쥘리앵은 행복한 마음으로 단두대에 오른다.

후작의 딸 마틸드는 쥘리앵의 잘린 목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레날 부인은 쥘리앵이 사형당한 며칠 뒤 숨을 거둔다.

묵상과 교훈
우리의 시선은 영원에서 출발하여 이 땅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경제적 곤궁 역시 그 비극적 인생의 주인공들이 영원을 먼저 바라볼 수 있다면 오히려 영광을 위한 산고로 그 본질이 달라질 것이다(로마서 8:18).

우린 어떻게 영원을 품을 수 있을 것인가? 답은 예수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영원하시며, 또한 우릴 영원으로 이끄실 관문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 예수가 우리 안에 있게 될 때 우린 영원으로 들어간다.

물론 자유를 위해, 평등을 위해, 빵을 위해 이 땅에서 싸워야할 땐 싸워야 한다. ‘적과 흑’의 쥘리앵도 싸웠다. 아니, 싸운 정도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교회를 이용하고, 여자를 유혹하며, 온갖 권모술수를 다 동원했다

그에겐 이 땅의 삶이 전부였다. 그는 영원의 눈을 갖지 못했다. 쥘리앵이 그리스도인이었다면 그는 다르게 싸웠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싸우되, 하나님의 방법으로 싸운다. 예수님이 그렇게 싸우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순간에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라고 기도하셨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졌다. 그러나 모두가 졌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결정적인 승리가 이루어졌다. 그 승리를 예수님은 요한복음 19:30에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는 최후의 언어로 선포하셨다.

예수의 제자는 그렇게 싸워야 한다. 싸우되 적을 용서해야 한다. 원수조차 사랑해야 한다. 설사 적을 쓰러뜨렸다해도 미움과 복수심으로 이긴 것이라면 우린 패배한 것이다. 그것이 칼을 들고서도 사랑과 용서를 포기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전쟁이다. 그 싸움에서 승리할 때 전쟁터에 십자가가 세워진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의 귀로 2천년전 예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될 것이다. 다 이루었다!

쥘리앵의 마음엔 진실된 사랑이 없었을까? 전혀 없진 않았겠지만, 그의 사랑은 지나치게 오염되었다. 레날 부인이든 마틸드든, 그는 사랑을 출세의 징검다리로 활용했을 뿐이다. 사랑이 오염되면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버려질 뿐이다.

우리의 사랑은 종종 거룩을 상실한다. 쥘리앵의 사랑이 그랬다. 그는 자기의 유익만을 구했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고 진리보다 불의를 기뻐했다(고린도전서 13장 참조). 성경은 이를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건 단지 정욕이요 탐심이었을 뿐이다.

그런 쥘리앵이 단두대에 서기 전, 옥바라지를 하는 레날 부인에게서 처음으로 사랑의 내음을 맡게 된다. 그는 비로소 사랑이 주는 행복감을 느끼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이 소설에서 우리 독자들이 얻는 감동적인 교훈이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

‘적과 흑’은 독자에게 신앙에 대해서도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소설 속에서 교회는 타락하여 세상 권력과 한 배를 타고 있다. 옷의 색깔만 적색과 흑색으로 다를 뿐, 출세를 향한 욕망은 사실상 같다. 쥘리앵류의 기독교인은 십자가란 예수만 지는 것이고 자신은 오직 그 열매만 취하면 그뿐이라고 여긴다.

그들의 믿음은 형식적이며 신앙고백은 앵무새의 입놀림에 불과하다. 자기소개서의 종교란에 기독교를 적는다고 해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건 아니다. 그 누구든 삶의 중심에 예수가 없다면 가라지 신도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에서 쥘리앵이 뒤늦게나마 레날 부인과의 사랑을 확인하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건 무척 다행한 일이다. 그렇다 해도 작가는 끝까지 회심한 신앙인으로서의 쥘리앵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린 단두대 앞에 선 그에게서조차 참된 회개를 볼 수 없다. 그 점이 ‘적과 흑’을 읽은 소설예배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렇다면, 우린 어떤가? 소설 제목에서 적(赤)은 군복을, 흑(黑)은 사제복을 상징했다. 이를 우리에게 적용하여, 세상 속의 삶을 적색 옷이라 하고, 교회 속의 삶을 흑색 옷이라 한다면, 우리의 ‘적과 흑’은 쥘리앵의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