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십자가의 무거움

채원병목사<오클랜드 정원교회>

젊어서 한때, 예수님에게 깊이 빠진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종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종교에 대해 알고 싶어서 종교반이란 서클에 가입하러 갔더니 기독교 모임이다. 돌아 나오려고 하는데 한 친구가 말한다. “우선 기독교란 종교부터 알아 보지?” 그래서 기독교 서클에 가입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
매주 토요일마다 젊은 목사님이 와서 말씀을 전하는데 예수라는 분을 통해서 펼쳐지는 전혀 새로운 세계에 관한 내용이었다. 낯설지만 사춘기 젊은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니 교회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집 주위에서 괜찮은 교회를 찾느라 몇몇 교회를 방문해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교회는 없었다. 집에서 가까운 교회가 하나 있었지만 일본식 건물로 좀 칙칙해 보여서 갈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다 토요일 오후에 그 교회 앞을 지나는데 예쁜 여학생 하나가 그 교회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냥 따라 들어갔다. 그렇게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몇 개월이 지나자 내 입에서도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틈틈이 말씀을 읽고 읽었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고, 점심시간에는 성경을 들고 조용한 곳을 찾아 말씀을 읽었다. 사복음서의 말씀들이 너무 달고 오묘했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 이것이 첫 번째 부르심이었다. 그러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회의가 들고 교회에서 멀어졌다.

이민 와서 8년이 지났을 때다. 교회를 떠난 지 근 30년이 다 되어서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 교회에 다시 다니고 싶어서 나간 게 아니라 나가야만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부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말기 위암과 치매로 양로병원에 잠시 계셨다. 말도 안 통하고, 음식도 맞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는 집으로 너무 오고 싶어 하셨다. 집으로 모시고 오자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시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좋아했다.

친구를 불러 낮에 와인을 한 병 마시고 돌아가는 길에 음주운전으로 걸렸다. 전에도 이력이 있는지라 사회봉사명령이 떨어지고, 봉사차원에서 밀알선교단과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다. 강제로, 그렇게 교회에 다시 나가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첫 예배를 드리러 예배당 의자에 앉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되었고, 바로 말할 수 없는 평강이 찾아왔다. 마치 주님께서 ‘내가 너를 불렀다’고 말씀하신 것 같았다. 아니, 정말 그렇게 내 마음 속에 말씀하셨다. 이민을 온 것도, 심지어 음주운전조차도 주님께서 부르시는 방법이셨다. 한 순간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삶을 인도하셨음을 알게 하셨다.

바로 성경책을 한 권 구입했다. 갈급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나갔다. 중간 중간에 회의가 들기도 했지만, 마구 마구 읽어나갔다. 밤에는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 골방에서 통성기도가 쏟아져 나왔다.

매일 밤에는 철야기도, 낮에는 성경통독, 그렇게 일 년이 지나자, 신학을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나이 오십이 넘었기에 체념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집의 가스벽난로가 고장이 나서 사람을 불렀는데 어느 키위 할아버지가 왔다. 할아버지가 난로를 고치는 동안 여느 때처럼 성경을 읽고 있었다.

잠시 후에 할아버지가 다 고쳤다고 말하면서, 대뜸 한다는 소리가, “Why don’t you obey? God is calling you!”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르시는구나. 뒤도 안 돌아보고 신학수업의 길로 나섰다.

작은 십자가
목사가 돼서 돌아왔을 때는 다니던 교회가 깨져서 둘로 나누어진 상태였다. 원래 목사님께서 찾아와서 함께 일하자고 말씀하는데, 주께서 마음 속에 순종하라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담임목사보다 나이가 많은 부목사. 그리고 육 개월 후, 목사님은 한국으로 가고 내가 담임을 맡게 되었다.

막연하게 보아왔던 목회가 해보니 많이 힘들었다. 목회를 하기에는 부족한 점도 너무 많았고, 고향 목회가 내겐 너무 버거웠다. 예수님도 고향에서는 배척을 당하셨는데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내게는 무거운 십자가였다.

그리고 일 년 칠 개월 후에 원래 모 교회와 다시 합치게 되었고, 현재까지 같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쉬운 목회가 어디 있겠냐 마는 내게는 힘에 부치도록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다. 교회가 잠시 부흥하는 듯 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 시간들이야말로 너무나 소중한 은혜의 시간들이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훈련의 시간들이었다. 꽤 가득했던 예배당이 텅 비어 보였다.

아무리 기도로 마음준비를 하고 강단에 올라도 눈에 보이는 현실 앞에서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면서 사람 있음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한 분만을 바라보게 하셨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로마서 8:24). 눈에 보이는 것들에 소망을 두지 않게 하시고, 보이는 않는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나의 능력을 보고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나의 무능함을 모르고 부르신 것도 아니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이시다(에베소서 1:4).

모든 것을 아시고, 정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이고 부르심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일방적 선택과 부르심이시다. 아무 때나, 아무 자리에서나 부르신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시는 이의 주권적이고 구체적인 부르심이다. 지금 이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자리다.

십자가는 커서 무거운 것이 아니다. 원래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운 것이다. 작은 십자가의 무거움, 그 십자가야말로 세상에서는 부인 당하는 십자가다. 자기 부인이 없이는 결코 질 수 없는 주께서 내게 주신 너무나 소중한 사명의 십자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