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첫째 주 찬송/3월 둘째 주 찬송

3월 첫째 주 찬송/302장(통일 408)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사도바울은 그의 편지 여기저기에서 그가 가졌던 교회음악관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말리엘 문하생인 것으로 보아 높은 경지의 학식뿐 만 아니라 예술의 수준까지도 대단했으리라 생각됩니다. 특히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는 당시 교회음악의 장르를 단어 한 자도 다르지 않게 밝히고 있는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지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에베소서 5: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로새서 3:16)

찬송학자들은 여기에서 말하는 시(psalm)는 구약의 시편으로 오늘날 찬양대의 수준 높은 찬양 곡이고, 찬송(hymn)은 말 그대로 회중찬송,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는 지금의 복음성가나 CCM, 경배와 찬양 같은 사적인 노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같은 노래들을 부를 때의 연주법까지 일러주고 있는데요, 즉 ‘마음으로’(in your hearts) 부를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찬송을 부를 적마다 찬송 시가 곡조로 어떻게 표현이 되었는가를 생각하여보면서 노래할 때 더욱 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사의 단어가 가지는 뜻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을 어화(語畵, word painting)라고 하는데요, 노래하면서 그 경치를 상상해보는 것도 한층 재미있지요.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다 보면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절로 듭니다.

악보 경치를 한번 보세요. 음표의 높낮이를 따라 곡선을 그려보면 넘실거리는 웨이브를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높은 음은 물결이 높은 모습이고 낮은 음은 물결이 낮은 모습이지요.

1절에서는 그 옛날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의 배에 올라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 보라”시던 음성이 들려오는 듯 하고, 2절과 3절에선 파도치는 바다와도 같이 인생살이에서의 크고 작은 파고(波高)를 보게도 되지요. 그런가하면 4절에선 그 파고를 오히려 기회로 여기며 즐기라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앞에 보이는 파도만을 보고 그 바다 밑의 무궁무진한 고기떼를 보지 못하는 눈 어두운 우리를 향하여 은혜의 “깊은 데로 가라” 명하시기도 하고요.

이렇듯 음표에는 우리가 이해할 만큼의 상징이 들어있지요.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1-8마디)와 “내 주 예수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13-16마디)의 높낮이가 파고의 곡선이었듯이 후렴의 “언덕을 떠나서”에서의 언덕은 정말 높은 언덕처럼 음이 높고, “창파에 배 띄워”는 겁먹은 얼굴로 구경만 하던 언덕에서 내려와 배를 띄우듯 음이 낮습니다.

찬송 시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은 캐나다 계 미국인인 심프손(Albert Benjamin Simpson, 1848-1919)목사님이 지었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의 낙스 대학을 나온 장로교 목사님으로 특히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평생 헌신하셨다고 해요.

오른 쪽 위에 보면 영문 고딕체로 LAUNCH OUT라고 쓰여 있지요? 배를 물에 띄운다는 뜻으로 찬송의 곡명(tune name)입니다. 곡을 지은 카터(Russell Kelso Carter, 1849-1926)목사님은 다재다능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음악은 독학으로 공부했다는데도 찬송가를 많이 지어 이름을 날렸다고 하니까요.

작사자와 작곡자 이름 옆에 1891년이라고 작사 작곡 연대가 표기되어 있지요? 심프손 목사님과 카터 목사님이 공동으로 편찬한 ‘성도의 생활 찬송가’(Hymns of the Christian Life)에 발표한 해입니다.

우린 찬송 시 속에서 세 종류의 사람을 봅니다. 낫기를 바라나 베데스다 못가에 앉아 꼼작도 않고 한탄만하는 38년 된 앉은뱅이(요한복음 5;1-9)같은 사람(2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보고도 두려워 원망만 했던 열 명의 정탐꾼(신명기 1;19-28)같은 사람(3절), 그런가하면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바라보며 굳센 믿음으로 나아가는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4절)이지요. 이들을 향한 소리가 들립니다.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라고.

3월 둘째 주 찬송/412장(통일 469)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감리교의 캠프집회(1889년)에 참여한 미국의 전도자 쿠퍼(W. G. Cooper, 19th C)는 우연히 ‘놀라운 평화’란 제목의 시가 적힌 쪽지를 길에서 줍게 됩니다.

이 찬송 시가 적힌 글을 읽다가 깊은 감동을 받아 곧바로 오르간 건반으로 달려가 WONDERFUL PEACE란 멜로디를 단숨에 작곡하였다는군요. 그런데, 이 시가 적힌 쪽지를 떨어뜨린 장본인이 누군가하면 바로 같은 집회에 참여한 전도자 코넬(W.D.Cornell, 19th C.)이었다고 합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Peace, peace, wonderful peace, Coming down from the Father above) 그렇습니다. 위로부터 흘러내리는 평화의 원천(源泉)은 하나님 아버지인 것인 것이죠.

‘내 맘에 한 노래 있어’(410장)를 지은 빌혼(P.P.Bilhorn, 1865-1936)도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Peace, peace, sweet peace! Wonderful gift from above)이라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느니라”(빌 4;7)

2절을 보니까요,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What a treasure I have in this wonderful peace, Buried deep in the heart of my soul)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아무도 없으리라”
(So secure that no power can mine it away, While the years of eternity roll!)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 그야말로 안전하게 간직된 보배, 평화야말로 우리의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생기’, ‘선물’, ‘보화’, ‘평화’ 이 단어들을 거듭 외어가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어요. 피조물인 인간은 누구나 마음 “그윽히 깊은 데”에 조물주께서 숨겨주신 최고의 선물, 심금(心琴)이란 악기가 들어 있다고 말입니다.

이 악기가 보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먼지가 쌓이고 녹슬었더라도 이 악기를 꺼내 들기만 하면 곧바로 생기가 넘쳐 평화의 노래 “하늘 곡조”가 흘러나오는 것이죠. 그러노라면 ‘즐거움의 길’이 열리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찬송의 궁정’ 입구인 ‘감사의 문’턱에 다다르게 되지요.(시편 100;1-4)

‘남몰래 흐르는 눈물’(Una furtiva lagrima)로 유명한 도니제티(G.Donizetti)의 오페라에선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을 사려 가짜 ‘사랑의 묘약’(妙藥)을 사 그 효능이 나타납니다만, 하늘로부터 내려온 음악, 하나님의 선물이야말로 평화의 묘약입니다. 주님은 찬송 가운데 거하시니 까요.(시편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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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엽
연세대 성악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서울시합창단 단장 겸 상임지휘자. 1960년부터 전국을 무대로 광범위하게 교회음악 활동을 하면서 김명엽의 찬송교실1-5을 예솔에서 출판했다. 이번 25회 연재를 통해 교회력에 맞추어 미리 2주씩 찬송가 두 곡씩을 편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