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트라공 : 어디로 갈까?
블라디미르 : 멀리 갈 순 없지.
에스트라공 : 아냐, 아냐. 여기서 멀리 가버리자.
블라디미르 : 그럴 순 없지.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내일 다시 와야 할 테니까
에스트라공 : 뭣하러 또 와?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리러.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는 아일랜드 출생의 프랑스 소설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가 1952년에 출간한 2막의 희곡이다. 고도의 줄거리를 한 단어로 줄이면 기다림이다.
블라디미르(Vladimir)와 에스트라공(Estragon)은 한 국도변의 작은 나무 옆에서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린다. 두 사람 모두 고도가 누군지 모른다. 다만 그가 오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구원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 이야기 정도다.
블라디미르 : 구세주라니까. 도둑놈들하고. 그런데 그중 한 놈은 구원을 받았는데 또 한 놈은….(구원의 반대말을 찾으려고 애쓴다) 저주를 받았지.
에스트라공 : 무엇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거야?
블라디미르 : 지옥으로부터.
밤이 되자 고도의 메신저인 소년이 등장하여 고도씨가 오늘은 오지않고, 내일은 꼭 온다는 전갈을 전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앞에 럭키(Lucky)와 포조(Pozzo)가 나타난다. 1막에서 럭키는 목에 밧줄을 매고 두 손에 무거운 짐을 들었고, 포조는 그를 억압하고 조종하는 거만한 모습이다. 그러나 2막에선 포조가 장님이 되었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었다.
소년이 다시 나타나 고도씨는 오늘 오지않는다는 전갈을 되풀이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내일 끈을 챙겨와 고도가 안오면 목을 매자고 다짐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입으로는 떠나자고 하면서도 꼼짝도 않는다.
이렇듯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5명의 인물이 등장해 알 수 없는 허튼 소리를 내뱉는 것이 전부다.
고도는 누군가? 아무도 정확한 답을 모른다. 어떤 이는 그를 신이라 하고, 어떤 이는 자유나 희망 또는 행복이라고도 하고, 심지어 죽음이라 해석하는 자도 있다. 작가 베케트 자신조차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름하여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이다. 허튼 짓, 허튼 소리의 연속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지하게 말하니 관객들이 기가 막혀 웃는다. 부조리극엔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바, “목적이 이끄는 삶” 식의 주제가 없다. 이들은 “목적 없이 표류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표현코자 한다.
그들의 사상적 배경은 실존주의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명제처럼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고 생각한다. 이러한 부조리는 대체 왜 생기는 것일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 부조리의 감춰진 뿌리를 알려준다. 예레미야 2:13 말씀이 그것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주인노릇하려는 인본주의.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의 삶이 곧 부조리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사르트르의 명제는 뒤집혀야 한다. 본질이 실존보다 앞서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주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실 때에야, 무너진 성벽이 재건되듯 부조리의 터진 웅덩이가 메워질 것이다.
성경에도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과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떠났을 때 그리스 아테네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들 역시 고도처럼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고 있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사도행전 17:23)
사도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을 그리스도 예수와 접목시켰다. 사도 바울이라면, 고도 역시 바로 그 알지 못하는 신의 하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우릴 ‘예수를 기다리며’로 인도하는 율법 외의 또다른 몽학선생(갈 3:24) 노릇을 한다.
이 작품에서 고도는 공허한 존재다. 역사하지 않는 희망이다. 극중에서 블라디미르가 고도의 메신저인 소년에게 “고도씨는 뭘하고 있니?”하고 물었을 때 소년은 “고도씨는 아무 것도 안하세요.”라고 대답했다. 누군지도 모르고 아무 것도 하지않는 이름 뿐인 구원자가 고도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내일도 고도가 안오면 목을 매자고 말하지만, 정작 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도는 자신에 대한 희망처럼, 자신으로 인한 절망 역시 그저 막연하기만 한 존재다.
성경을 잠시 묵상해보자. 만약 예수님이 막연한 재림의 희망으로만 남아계신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예수도 고도와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로 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전 4:20).
그러므로 우린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를 살고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내 신앙은 그저 막연한 희망에 불과하다. 실존주의에만 부조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에도 부조리가 있다. 구원, 구원하며 예수아닌 고도를 좇고있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혹 내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우린 이 작품에서 억압자 포조와 노예 럭키도 만난다. 럭키는 노예로 타성화되고 길들어져 포조의 일부가 되었다. 2막에서 포조가 장님이 되면서 럭키가 자유의 기회를 얻지만, 럭키 또한 벙어리가 되어 저항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성경에도 이들, 포조(죄)와 럭키(죄인)가 있다. 로마서 6:6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한다.
죄인은 이미 자기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죄를 스스로 떨궈낼 수 없다. 포조(죄)에게 다시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선 모든 럭키(죄인)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는 구원때문이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지를 에스트라공이 묻자 블라디미르는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답한다. 맞는 말 같지만 진리의 반쪽에 불과하다. 성경의 구원은 결코 우리가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는 것 정도가 아니다. 구원받은 자는, 고린도후서 5:17 말씀대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의 경이로운 새 삶을 약속받는다.
빌립보서 1:11을 읽어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 읽었다면, 이제 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고도의 자리에 참 구원자 예수가 임하실 것이다. 예수만이 우릴 부조리에서 해방시켜준다. 참된 구원의 길이 예수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