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은 실체를 드러낸다. 신앙도 같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진짜가 아니고 충돌을 통해 드러난 모습이 진짜이다. 예레미야 42:1-6의 배경은 유다 멸망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다. 예레미야 39장에서 유다가 멸망했다.
성전, 왕궁, 예루살렘 백성의 집들이 불살라졌고(열왕기하25:9), 성벽은 헐리고 쓸만한 사람들은 다 잡아갔다. 비천한 사람들만 남겨져 농부가 됐다. 그리고 유다에‘그다랴’총독을 새워 관리하게 했다. 유다는 한 마디로 폐허와 황무지가 됐다.
그다랴 총독이 미스바에서 나름대로 무너진 유다를 다시 세워보려고 애를 썼다. 광야로 도망간 군 지휘관과 부하들, 주변국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때 요하난이라는 지휘관이 총독에게 총독 살해 첩보를 알렸다. 암몬이 이스마엘을 이용하여 총독을 살해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총독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은 남은 사람들이 하나로 뭉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총독은 이스마엘을 초대해 식사를 베풀었다. 그런데 식사 자리에서 이스마엘이 함께 데려간 사람들과 함께 총독을 살해했다. 총독 관저 갈대아 군대까지 죽였다.
이스마엘은 자신의 비행이 드러날까 봐 순례객 80명 중의 70명 살해했다. 또다시 유다에게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이스마엘이 미스바에 있는 모든 백성을 사로 잡아 암몬으로 떠났다.
이 일이 요하난에게 알려져 남은 모든 군 지휘관과 군사를 이끌고 이스마엘을 추격했다. 기브온 큰 물가에서 만났다. 모든 백성이 요하난을 환영하자. 이스마엘은 추종자 7명을 데리고 암몬으로 도망갔다.
요하난이 남겨진 백성을 데리고 돌아오다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바벨론 왕이 세운 총독이 살해당하고, 갈대아 군사들이 살해당했으니 반드시 보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남은 백성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려고 길을 나섰다. 가다가 영 찜찜해했다. 그래서 베들레헴 근처 게롯 김함에 이르렀을 때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요하난과 모든 백성이 한 마음으로 탄원하며 기도 부탁한다. 2절과 3절에“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자세 아닌가? 기도를 부탁하고, 하나님이 갈 길과 할 일을 보여주시기를 원한다! 예레미야가 이들의 요청을 받고는 승낙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없이 말하겠다! 그러자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또 말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주시는 모든 말씀은 그 말씀이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 안 하나 하나님이 증인이 되시길 바랐다.
여러분, 이들의 겉으로 드러난 고백을 볼 때, 어떤가? 참 좋은 신앙과 자세를 가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본문만 보면 이들의 참 좋은 신앙과 자세를 가졌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충돌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열흘이 지났다. 예레미야가 열흘 간 기도한 후 하나님의 응답을 전했다.‘하나님의 응답을 전하겠소!’남은 백성들이 다 모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애굽에 내려가지 말고 이 땅에 눌러앉아 살라고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심고, 세우셔서, 뽑히고 헐리지 않게 하실 것이란다.
그리고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들도 나중에 포로 귀환시키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만일 이 말에 순종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면 다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고집 피우고 애굽으로 내려가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다 죽고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본문 다음인 7-17절의 말씀이다.
여러분에게 기도 부탁을 하고 이렇게 응답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는가?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나와야 정상일 것이다. 열흘 전에 예레미야에게 기도 부탁할 때, ‘무슨 말씀을 전해 주시든, 그것이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 막론하고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순종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증인이 되십시오.’라고 말했던 사람들이다. 당연히 ‘예’하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멈추고 약속의 땅에 눌러앉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전해준 기도 응답이 그들에게 충돌을 일으켰다. 기도 부탁하기 전에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들은 내심, 애굽으로 내려가도 된다는 응답을 기대했다. 자기들의 계획과 본심과 전혀 다른 기도응답이 떨어진 것이다.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이들의 실체가 드러났다. 아름답게 포장된 신앙의 허울이 벗어지고 불신앙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한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이다.“하나님께서 그렇게 응답하실 리 없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과 맞으면 하나님의 뜻이고 맞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 곧 하나님의 뜻인 사람들이다.
43장 1절과 2절을 보면,“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신 이 모든 말씀을 말하기를 마치니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리고는‘바룩이 부추겨서 우리를 갈대아 사람들 손에 넘겨주어 죽이고 바벨론으로 넘기려는 수작이지!’라고 한다. 43장 3절 보자.“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마치 사실인 양 말한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끌고 애굽으로 내려간다. 애당초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마음이 없었다.
자기들의 생각에 맞을 때만 하나님의 뜻이고 자기들의 생각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도 거짓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들의 신앙은 말씀 안에 있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각 안에 있는 신앙이었다. 하나님이 주인 된 신앙이 아니라 자신들이 주인 된 신앙을 가진 자들이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42장 20절“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그들의 신앙은 속이는 신앙이었다. 그들의 고백은 거짓이었다. 우리의 신앙은 진실한가? 우리가 입술의 고백과 가는 길과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가? 충돌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모른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나의 뜻을 굴복하고 주님이 가라 하시는 그 길을 가고, 주님이 하라 하시는 그 일을 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 일이 내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이들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