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분의 축구, 모두의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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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그 뜨거운 열기를 아직 기억한다, 당시 뉴질랜드 이민을 앞두고 친구들과 거리응원을 나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조별 리그 마지막 포르투갈 전, 박지성의 발끝에서 나온 그 결승 골은 지금 유튜브에서 다시 보아도 전율이 흐를 감명 깊은 장면이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첫 16강 진출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던 그 몇 주간의 대한민국은 정말 뜨거웠고, 모두가 하나였다.

90분이란 시간이 참 길다 싶으면서도, 그 쫄깃쫄깃한 맛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것이 곧 축구의 매력인 것 같다.

대한민국이 한창 축제 분위기이던 그때, 일본 열도에서도 한창 조별 리그가 진행 중이었다. 영원한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는 소위 죽음의 조에 속해 있었는데, 자그마치 상대가 잉글랜드, 스웨덴, 나이지리아였다.

축구종가이면서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맞수 잉글랜드,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은 우리가 잘 아는 데이비드 베컴, 마이클 오언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전설의 선수들이 광풍을 일으키던 팀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아쉽게도 마이클 오언의 헐리우드 액션에 의한 페널티 킥 허용으로 1:0으로 석패하면서 결국 16강 진출도 하지 못하고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게 되었다.

그때 오언에게 태클하지도 않았건만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역적으로 찍혀 다시는 국가대표에 소집되지 못했던 한 수비수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지금 손흥민이 뛰고 있는 토트넘 핫스퍼 FC의 감독이다.

토트넘의 투혼, 기적의 결승 진출
UEFA 챔피언스 리그(Champions League, 이하 챔스)는 매년 7월경 예선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5월경까지 이어지는, UEFA 주관 축구 클럽 대항전이다.

세계 축구의 중심인 유럽 전역의 강호 클럽들이 모여 최강팀을 결정하는 대회로 유럽 최고의 클럽을 결정하는 대회이다. 그래서 FIFA 월드컵과 함께 더불어 축구 선수들에겐 누구나 한번은 꿈꿔보는 무대이기도 하다.

축구 선수들에게 있어 FIFA 월드컵에서 우승 트로피를 드는 건 국가대표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영예로 여겨진다면, 이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드는 건 클럽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영예로 여겨진다.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챔스 결승에서 뛰어본 유일한 대한민국 선수이지만, 이번에 토트넘이 기적적으로 챔스 결승에 진출하면서 손흥민이 그 두 번째 선수가 되게 되었다.

토트넘 핫스퍼는 사실 프리미어 리그 중위권에 머물던 팀이었으나, 포체티노가 지휘봉을 잡은 몇 년 사이에 엄청난 팀이 되었다.

이번 시즌에도 어렵게 챔스 4강에 올랐지만(그 강하다는 맨체스터 시티까지 8강에서 잡아가면서!) 4강 상대인 젊고 패기 넘치는 아약스와의 1차전에서 1:0으로 패하고 만다.

이날 손흥민은 경고 누적으로 결장했고, 2차전에서 큰 활약을 해줄 것으로 모두 기대했지만 2차전 전반 결과는 2:0으로 아약스의 결승 진출이 확실시되는 듯했다.

하지만 공은 둥글다고 하지 않던가. 야구는 9회 말 2아웃부터 라더니, 포체티노는 대대적 전술 변화를 주었고, 이것이 주효해 한 골씩 만회하기 시작하더니 후반 추가 시간 경기 종료를 10초 정도 남겨두고 루카스 모우라의 천금 같은 골로 3:2로 승리하면서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챔스 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토트넘이 새로운 축구장 건설을 이유로 선수 영입에 많은 돈을 쓸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결과를 냈다는 점을 볼 때 포체티노는 정말 명장임이 틀림없다.

마지막 골이 들어간 후 손목시계를 풀며 잔디밭에 엎드러지는 그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마치 2002년의 히딩크를 보는 것 같았다고나 할 까!

경기 후 인터뷰 때 울먹거리며 축구를 사랑한다고, 축구가 아니었으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라고 고백하던 포체티노 감독.

아마 17년 전 저 먼 동아시아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겪었던 뼈아픈 경험이 인생의 자양분이 되어 지금의 자리까지 온 것이겠지. 나도 함께 울었다.

마라톤 같은 인생
결승 상대 팀인 리버풀도 마찬가지다. 리버풀의 위르겐 클롭 감독은 선수 시절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진 않았다.

본인의 입으로 직접 “자신의 기술적 역량은 5부리그 수준, 전술적 이해도는 1부 리그 수준, 그래서 총합 2부 리그 수준의 축구선수”였다고 말했다고 하니, 그는 어쩌면 자신의 위치를 알고 노력해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된 또 하나의 숨은 스토리를 가진 명장이다.

리버풀의 4강 상대는 자그마치 축구의 신이라고 불리는 메시의 팀 바르셀로나였는데, 1차전 3:0의 쓰라린 패배를 2차전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4:0으로 이겨 결승으로 가는 꿈을 이루어냈다.

부상으로 결장했던 리버풀의 공격수 무하마드 살라는 “NEVER GIVE UP!(절대 포기하지 마!)”라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고 응원을 했고, 그들은 최강자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준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단순히 공을 차고 골을 넣는 것을 넘어선, 축구라는 스포츠가 내게 가르쳐준 전화위복의 의미는 꽤 크다. 우리는 오늘 미끄러질 수도, 패배할 수도, 혹은 사람들에게 조롱당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서사(narrative)가 이 90분에 녹아 있기에, 스포츠 이상의 어떤 감동을 주며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것 아닐까.

인생은 패자 없는 경주
변수들이 가득한 인생이라는 경주에는 결코 패자가 없다. 누구나 참 아픈 시절이 있고, 찬란하게 빛나는 계절이 있는 것처럼, 나의 겨울과 당신의 여름이 만나기도 하고 나의 가을과 당신의 봄이 어우러지기도 하는 신비가 있다.

그러니 우리 아픈 시절을 지날 때 남의 찬란함을 보며 낙담치도 말고, 다른 사람의 아픈 시절을 위로 삼아 나의 찬란함의 재료로 삼지도 말자. 그저 지금 주어진 계절을 살아내며 가보자.

그 모든 희로애락의 계절을 견뎌내는 것이 곧 인생의 의미일 테니까. 90분의 경기가 끝난 뒤 희비가 갈린 양 팀에게 잘했다고 서로 박수를 보내 주는 것처럼.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막판에 기록한 득점, 극적인 승부, 심지어 패배하는 순간조차, 그 모든 것이 우리, 바로 이 위대한 클럽의 일부인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 믿기지 않는 경험이었던 거죠. 그 점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알렉스 퍼거슨 경의 은퇴 연설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