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둘째 주 찬송/1월 셋째 주 찬송

1월 둘째 주 찬송/212장(통347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도시라솔파미레도’살포시 내려와 힘주시는 주님
내 나이 갓 서른이 될 때쯤, 그때 보아도 꽤 시간이 지났을 낡은 SP판(유성기판)이 내 손에 쥐어지는 순간 큰 보물을 얻은 듯했습니다. 기독교 방송국이 제작한 네 장짜리 찬송가 음반인데, 연초록색 바탕에 덜 세련된 글씨(당시로선 멋을 낸 것이겠지만)로 ‘드디어 나오다! 찬송가 레코-드’라 쓰여 있는 걸로 보아 추측건대 우리나라 찬송가 연주의 최초 음반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대문교회 성가대(지휘/박태준, 오르간/박정윤)가 연주하는 ‘겸손히 주를 섬길 때’를 시작으로 영락교회(지휘/박재훈), 정동제일교회 성가대(지휘/서수준)와 시온성(지휘/이동일), 필그림 합창단(지휘/이동훈), CBS 사중창단(반주/박재훈), 소프라노 유경손(반주/나운영), 테너 이인범(반주/이정희) 등 당시 최고 음악가들의 연주입니다.

뿐만이랴! 박태준, 나운영, 이인범은 나의 스승이요, 이동훈은 친구의 부친이고, 박재훈은 친구의 매형, 반주의 이정희(이인범의 부인), 유경손(나운영의 부인)은 사모님이요, 박정윤은 피아노 부전공 교수님이고 보니 나에겐 더더욱 값지지 않습니까?

이때부터 이 한 장의 명반(名盤)은 우리 집 가보(家寶) 1호가 되어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스레 유성기 태엽을 감아가며 듣곤 하였습니다. 얼마 전, 이 헤진 음반을 남대문교회 역사관에 기증하면서 이젠 은퇴 장로 권사인 몇 분을 모셔 자신들 젊은 시절의 음성을 들려드렸는데, 감회어린 그들의 주름진 얼굴에서 평생을 겸손히 주를 찬송하며 섬긴 신앙인의 천로역정(天路歷程)을 보았습니다.

원래 이 찬송의 멜로디 MARYTON은 영국 국교회 스미스(Henry P.Smith)목사가 ‘영혼의 햇빛 예수님’(60장) 가사를 위해 작곡하여 1874년 찬송가(Church Hymns with Tunes)에 실린 것인데 작사자인 글래든(Washington Gladden, 1836-1918)목사가 이 멜로디를 두고 작시하였기에 8.8.8.8.운율의 두 찬송은 형제 찬송으로 멜로디를 서로 바꾸어 불러도 됩니다.

작사자 글래든(Washington Gladden, 1836-1918)은 미국 회중교회 목사로 1879년 그가 편집자로 있던 잡지인 ‘주일 오후’(The Sunday Afternoon)에 ‘하나님과 동행’(Walking with God)이란 제목으로 이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여성적인 이 찬송 시의 느낌과는 달리 과격하고 급진적인 신학 사상을 가진 그는 복음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생활에 적용되어야 하고 간섭해야 된다고 주장하며 노동 현장에까지 깊숙이 관여하여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행동으로써 일깨웠습니다.

아홉째 마디, “구주여”에서 뛰어올라 “내게 힘주사 잘 감당”의 멜로디가 ‘도시라솔파미레도’로 한 옥타브나 순차적으로 하행(下行)하는 것이 마치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포시 내려와 보살펴 주심 같이 느껴집니다.

우리나라 교회음악의 선구자들의 젊은 시절 연주를 들으며, 오늘도 이들이 본을 보였던 예배 철학과 교회음악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1월 셋째 주 찬송/540장(통219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찬송은 시문학, 맞춤법과 문장을 올바로 사용해야
지난 몇 주간 주일예배 찬양곡을 연습하면서 우리말인데도 첫 문장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고민스러웠습니다.

“주 자비하신 중에서 내 곤한 영혼 쉬이며”로 시작되는 노래인데 내용이 이해되어야 찬양 대원도 감동하고 듣는 회중들도 은혜가 될 것 아니겠나 싶어 편집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 곡의 가사가 원래 합동 찬송가 322장이어서 문제가 있지만 그대로 실었답니다. 그리고 보니 어렴풋 청년 시절에 이 찬송을 불러본 기억이 납니다. 혹시 다른 번역이 있나 싶어 자료를 샅샅이 뒤지다 미국장로교 한영찬송가에서 “주 크신 사랑 가운데”라고 새로이 만든 번역 가사를 찾아내었습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이 찬송은 1908년 ‘찬숑가’에 처음 수록된 이래 거의 원문 그대로 불렀는데, 이번에 “사랑하는 말일세”를 “사랑한단 말일세”로 고쳤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 사랑한다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내용인 것 같아 영어 본문을 찾아보니 “I am Thine, O Lord, I have heard Thy voice, And it told Thy love to me”였습니다. 영시(英詩)가 우리 찬송보다 오히려 더 쉽죠. 그래서 번역을 반역(半譯? 叛逆? 反逆?)이라 했던가요.

일반 세속 곡도 그렇지만 특히 교회 성가는 노래보다 가사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성가의 가사는 노래를 하거나 듣거나 곧바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원시(原詩)를 멜로디의 제한된 운율에 맞추어 번역하다 보니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고사하고 말이나 글이 안 되는 경우도 흔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찬송작가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가 지은 이 찬송은 그의 동료인 도온(Willam Howard Doane, 1832-1915)의 집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할까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 영감을 얻어 지었습니다.

그래서 찬송시의 제목이 ‘더 가까이 나를 이끄소서’(Draw me near)인데, 후렴인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의 영어가사(Draw me near, near, blessed Lord) 첫 귀입니다. 추측건대 관련 성구가 히브리서 22장 10절인 것으로 보아 흠정역의 “Let us draw near”에서 힌트를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곡 이름도 찬송시의 영문 첫 귀인 I AM THINE. “임은 나의 것, 나는 임의 것”(아가서 2:16, 표준 새 번역 개정판)이란 구절이 생각납니다. 지금이라도 “주의 음성을”의 첫 구절을 곧이곧대로 “나는 주의 것”이라 바꾸어보면 어떨까요?

또 2절에서 “나의 품은 뜻 = 주의 뜻”이 되도록 해달라는 간구와 3절에서 “주의 얼굴을 항상 뵈오니 더욱 친근합니다.”는 고백은 원문보다 더 성경적이고 더 신앙적입니다. 약강조(弱强調)운율의 여린 박 시작임에도 착착 잘 들어맞는 가사이어서 부흥집회 때마다 흥 돋우는 단골 메뉴이지요.

작사 작곡자 이름 옆에 쓰인 1875년은 주일학교 찬송집(Brightest and Best)에 처음 실린 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