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 밭께로 흘러간다.”

‘메밀꽃 필 무렵’은 이효석(1907∼42)이 1936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이효석은 산허리를 온통 하얗게 덮은 메밀밭을 ‘소금을 뿌린 듯이’란 기막힌 어휘로 표현했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은 매년 9월 메밀꽃이 필 무렵이면 메밀꽃 축제를 열고 있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단지 장돌뱅이(여러 장으로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장수)의 하룻밤 사랑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글을 읽다 보면 웬일인지 성경을 읽을 때에나 느낄 수 있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게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줄거리를 살펴보자.

장돌뱅이 허생원은 왼손잡이에 얼굴이 얽은 곰보다. 여자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던 그는 옛날 봉평에서 하룻밤 정을 나누고 헤어진 성서방네 처녀를 잊지 못해 봉평장을 계속 찾는다. 어느 여름날 장사가 시원찮아 일찍 거둔 뒤 주막 충주집에 들러 술을 마시는데, 젊은 장돌뱅이 동이가 충주집과 농탕치는 것을 보고는 화가 치밀어 동이를 때린다.
그러나 동이는 얼마 후 허생원에게 되돌아와서 그의 나귀가 발광을 하고 있다고 알려줘 허생원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날 밤, 허생원은 친구 조선달, 그리고 동이와 함께 다음 장이 서는 대화 장을 향해 밤길을 나선다. 때는 메밀꽃이 필 무렵이어서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 피어있었다.

달빛에 취하면 으레 그랬듯이, 허생원은 또 다시 성서방네 처녀와 물방앗간에서 나눴던 하룻밤 인연을 얘기한다. 그녀는 집이 파산한 탓에 그 다음날 제천으로 떠나갔고 이후 허생원은 처녀를 찾아다녔으나 찾지못했다.

허생원은 동행하던 중에 동이 얘기를 듣게 된다. 동이가 아버지를 모르고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 동이 엄마는 달도 차지 않은 애를 낳고 집에서 쫓겨났다는 것, 그녀는 의부를 얻어서 술장사로 나섰으나 의부는 술 고주망태에 망나니였고, 견디다 못한 동이가 집을 뛰쳐나올 정도였다는 것. 무엇보다 동이 엄마의 고향이 봉평이라는 것.

허생원은 동이 엄마의 고향이 봉평이란 얘길 듣곤 개울에서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진다. 동이가 그를 업고 물을 건넌다. 허생원의 마음이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볍다.

허생원은 대화 장을 보고 나서 동이의 어머니가 산다는 제천으로 가고자 한다.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허생원은 동이에게 그렇게 청한다.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허생원은 동이의 채찍이 왼손에 들려있는 모습을 본다(주: 허생원도 왼손잡이다).

이 소설은 동이가 허생원의 아들일 것이란 암시가 결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감동적인가? 아마도 그건 이 소설이 예기치 않은 만남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의 하룻밤 만남. 허생원의 아들일 것으로 암시되는 동이와 허생원의 만남.그 두 만남은 둘 다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다가왔지만, 허생원에겐 인생 전부와 맞바꿔도 아깝지않을 가치를 지녔다.

허생원은 성서방네 처녀와 겨우 하룻밤을 보냈을 뿐이지만, 허생원에게 그녀는 그의 전부를 바친 사랑이었다. 사람과의 관계라는 게 사실 서로 알고 지낸 시간에 꼭 정비례하진 않지 않는가.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님과의 만남도 그렇다. 3년을 제자로 지낸 가룟 유다가 배신의 유혹에 넘어져 나락으로 떨어진 반면,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중 한 명은 예수님과 만났던 그 짧았던 시간을 통해 낙원에 이르렀다(누가복음 23장).

사랑만큼 진정성이 요구되는 일도 없다. 진정한 사랑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우린 성경에서 그러한 사랑을 접한다. 바로 로마서 8:38-39이 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린 사랑을 하되 전부를 바쳐 사랑해야 한다. 그런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수준의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첫째는 이것이니….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12:29-31)

허생원처럼 동이도 왼손잡이였다. 생물학적으로 왼손잡이가 유전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선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이 소설을 쓴 이효석은 허생원과 동이가 서로 같은 왼손잡이인 것이 부자지간이란 결정적 증거라는 암시를 주며 결말을 맺는다.

“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우린 자식을 낳을 때, 그 모습 속에서 나를 본다. 손주, 증손주에게서도 그들 안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유전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생물학적 현상은 어쩌면 사람이 타락 이후 잃어버린 영생의 흔적일 지도 모른다.

내가 죽어도 나의 모습이 후손에게 영원히 남아있다는 사실은 죽어가는 인생에게 어느 정도의 위로를 준다. 그러나 그 뿐이다. 거듭나지 못한 죄인은 겨우 그런 영생의 흔적 정도만 맛보는 데 그칠 뿐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실체적인 영생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마태복음 1장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는 장엄한 선포로 1절을 시작하며, 이어서 17절까지 42대에 걸친 “낳고, 낳고, 낳고….” 의 혈통 시리즈를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낳고” 시리즈는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의 “낳고” 이야기와 외형상 별로 다르지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42대째에 이르러 한 인물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된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6)

허생원과 동이의 연결고리는 왼손잡이였지만,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이어지는 혈통의 연결고리는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하나님의 은혜다. 그 은혜는 우리 모두를 영생의 실체이신 예수께로 인도한다.

로마서 6:23 에서 우린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영생을 확인할 수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희미한 흔적이 아닌, 실체로서의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져있다는 사실. 그것이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