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유의 범죄

문홍규목사<노스쇼어한인교회>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이다”

오직 명령에 따라 주어진 일을 했을 뿐
1960년 5월, 나치 친위장교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이 체포되었다.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로, 1급 전범이었던 그의 공개재판이 진행됐다. 그런데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악하고 아주 잔인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고, 자식들에게 존경을 받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으며 신앙심이 돈독한, 친절하고 선량한 이웃이었던 것이다.

“오직 명령에 따라 주어진 일을 했을 뿐” 아이히만은 자신을 그렇게 변호했다. 나는 내 주어진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다. 나는 명령을 받았으며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부여 받은 목적에 충실했을 뿐이다.

이 재판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말한다. 무지라는 것은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무지한 자는 일상 외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이 악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평범한 악을 경계하며 깨어있는 양심을 통해 무지와 결별해야만 한다. 따라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인 것이다.

사유의 종교 기독교
기독교란 사유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사유란 매우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며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지정의를 주셨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린도전서 14:20)”라고 한다. 잠언 2장은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지혜와 명철)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라고 한다.

잠언 가운데 독특한 말씀을 하나 찾아 볼 수 있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잠언 26:16)” 게으른 사람은 지혜롭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보다 자신을 더 지혜롭게 생각한다고 한다. 교만하다는 것이다. 잠언의 기자는 교만이라는 죄악을 게으름과 동일시 하고 있다. 둘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이 결국 교만이라는 열매로 드러나는 것이다.

무조건적 순종이 교회를 무너뜨렸다
한때 한국 기독교 사회는 상명하복의 문화만을 매우 가치 있게 여겼다. 영적 권위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이 교회를 화평하게 만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담임 목회자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들을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치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 내 기조는 이제 상당히 달라졌다.

이러한 순종의 모습이 교회에 병폐를 양산하면서부터이다. 무조건적인 순종이 사울 왕과 같은 담임 목회자들을 만들었으며, 무조건적인 순종이 권력에 눈이 먼 대형교회를 만들었다. 무조건적인 순종이 교회내 기득권 세력을 만들었으며, 무조건적인 순종이 교회로 하여금 성도를 교묘하게 조종(manipulate)하게 만들었다. 결국 무조건적인 순종만을 요구해오던 한국 교회는 이제는 이로 인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모습의 교회는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 같은 이들을 양성했던 독일 나치정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아이히만은 그저 아주 성실하게 아주 근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죄는 무엇이었는가? 사유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자신이 행한 일들이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유대인들을 어떠한 고통에 빠지게 할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승진을 위해서 근면하게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무사유의 범죄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잔혹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교회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교회 지도자들과 일반 교인들이 우리가 행하는 일들이 우리 교회 가운데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사회를 어떤 혼란에 빠지게 만들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자신과 가족과 교회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은 결국 자신이 다니는 교회와 수많은 영혼들을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절망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한때 교회는 그릇된 세상의 문화와 가치를 교정하며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었다. 신분제도를 폐지시키고 노예를 해방시키며 인간의 가치를 부각시켰다.

일본의 압제에서 국가를 독립시키고, 성경말씀에 입각한 국가를 세우게 하며 참된 공의와 평화를 이루게 한 시절도 있었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생각하며 참된 섬김과 봉사를 보고 듣고 배우게 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가 되었다. 이제 교회의 모습은 오히려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세상 보다 한참 뒤처진 모습으로 남게 하였다. 오히려 교회가 때로는 세상 보다 더 악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부와 화려함에 눈이 멀고, 부교역자들을 종 부리듯 대한다.

목회자들이 자신은 크고 럭셔리한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쪽방촌에 살고 있는 늙고 가난해 폐지를 주어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성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런 이야기들이 한국 교회의 극히 일부인 대형교회와 대형교회 목회자들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실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의 모습도 단정할 수 없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진정으로 그 사람의 본래 인격을 시험해 보려거든 그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줘 보라”라고 했다. 우리에게도 권력이 주어지면 우리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단정짓고 있는 것 또한 어쩌면 하나의 무사유를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종과 기독교적 사유
“기독교적인 사유란 두뇌의 생물학적인 반응을 넘어 하나님의 생각을 바라보는 것”
순종이라는 덕목이 기독교인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매우 당연한 것이며, 우리는 때로는 우리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조차 무조건적인 순종을 해야 할 때가 분명히 있다.

우리는 성경적 순종이 진실로 무엇인지 모르는 시대 가운데 살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기독교적 순종의 의미도 분명히 배워야 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회가 무조건적 순종 만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동시에 기독교적 사유 또한 가르쳐야 한다. 이 둘은 마치 상반되고 모순적인 개념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둘은 매우 상호보완적인 개념이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안된다. 둘 다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기독교적 사유란 무엇일까? 기독교적 사유는 우리의 육체가 반응하는 대로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기독교적 사유란 우리 두뇌의 본능적인 작용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인 사유란 영적인 사유이며, 이는 우리 두뇌의 생물학적인 반응을 넘어 하나님의 생각을 바라보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사유와 온전한 순종의 회복으로 이 땅 가운데 교회들이 교회답게 성장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