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권총은 당신의 손을 거쳐서 내게로 왔습니다. 먼지를 털어주셨다지요? 나는 수없이 권총에 키스를 했습니다. 당신의 손이 닿았던 것이니까요. 당신의 손에서 죽음을 받기를 원했는데, 아아! 지금 이렇게 나는 그것을 받은 것입니다.”
“로테! 나는 이 옷을 입은 채 묻히고 싶습니다. 당신의 손이 닿아서 성스러워진 옷입니다. 탄환은 이미 재어 놓았습니다. 시계가 12시를 칩니다. 그럼 로테, 잘 있어요! 안녕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The Sorrows of Young Werther)은 독일 작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가 1774년 25세 나이 때 쓴 소설로써 무명의 괴테를 단숨에 명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전 유럽에서 번역되었으며, 베르테르를 18세기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유럽의 많은 젊은이가 소설 속에 묘사된 주인공 베르테르처럼 푸른 프록코트(frock coat)와 노란 조끼의 옷차림을 하고 다녔고, 후대에 ‘베르테르 효과’라 불리는 모방자살이 젊은이들간에 전염병처럼 번져 한때 판매금지까지 당하였다.

이 작품은 주인공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Wilhelm)에게 쓰는 편지 체로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는데, 사건 전개, 심리묘사, 메시지 전달, 그 어느 것 하나 편지 체 속에서 소홀함이 없다. 편지를 쓰는 날짜조차 무의미한 나열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에 긴박성을 더해준다.

독자는 편지를 하나하나 읽어가는 중에 베르테르를 점점 더 깊이 알아가게 되고, 마침내 그가 자살에까지 이르는 심리적 비애와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문학적 탁월성이 과연 문호 괴테구나, 하는 감탄을 불러온다.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자.
주인공 베르테르는 우연히 참석한 파티에서 로테Charlotte)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미 로테에게는 약혼자 알베르트(Albert)가 있고, 베르테르 역시 이를 알고있다.

연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베르테르는 더 이상 그들 옆에 있는 것조차 괴로워 다른 곳으로 떠나보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고 만다.

그러나 알베르트와 결혼하여 유부녀가 된 로테는 베르테르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남편을 위해 베르테르와 거리를 두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로테를 찾아간 베르테르는 억제할 수 없는 감정에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키스를 퍼붓지만, 로테는 베르테르를 가슴에서 떠다밀고 절교를 선언한다.

실의에 빠진 베르테르는 여행을 빙자해 알베르트에게서 빌린 호신용 권총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쏘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된 당시의 계몽주의 사조로는 합리적 가치나 이성적 사고가 아닌, 사랑이라는 개인감정에 휘둘려 목숨까지 버리는 행위는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연인에 대한 사랑에 자신의 생(生)과 사(死)를 건 베르테르의 파격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열정의 불을 붙였고, 시대적 인습과 낡은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선언케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관습과 전통에 대한 반란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주인공 베르테르의 마음을 그토록 뜨겁게 달궜던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가 22세때 열네 살 연상의 여인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e)에게 바쳤다는 연시에서도 우린 그같은 사랑의 열기를 느낄 수 있다.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렵니다.”

성경 역시 남녀의 사랑에 관한 한, 한껏 열려있다. 성경 66권에서 사랑얘기로는 으뜸인 아가서를 읽어보자.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a Shulamite girl)에게 한 눈에 반해버렸고, 이후 둘의 사랑은 ‘이게 성경이 맞나?’ 하며 읽는 이가 눈을 의심할 정도로 뜨겁기만 하다.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아가 4:9)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남녀간의 뜨거운 감정, 그 이상이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의 본질은 나만을 위한 자기중심적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다. 성경의 사랑은 나와 사랑하는 대상 모두를 살리는 생명수다.

이에 비해 베르테르의 사랑은 어떤가? 그의 사랑이 성취되려면 로테와 알베르트는 파경에 이르러야 한다. 베르테르 자신 역시 로테를 포기할 수 없어 자살을 선택했다. 생명수이기는 커녕, 누구도 살리지 못하는 이러한 베르테르 류의 사랑을 성경은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로테와 알베르트의 결혼이란 굴레가 자신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 여겼다. 급기야 그는 결혼의 벽을 뚫고 로테와 사랑을 나누고자 했다. 결국 그의 사랑은 불륜을 충동질하는 구애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결혼은 단지 부부간의 법적 계약 정도가 아니다. 성경에서 결혼의 역사는 무려 창세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는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 하와를 만들면서까지 남녀를 하나로 맺어주시려는(창세기 2장) 하나님 뜻의 구현이자 하나님 사랑의 형상인 것이다.

아가서로 다시 돌아가보자. 솔로몬에겐 수많은 정략결혼의 여인들이 있었다. 그 여인들은 필시 권세있는 집안의 지체 높은 신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전혀 달랐다. 일을 하느라 햇볕에 타, 게달의 장막처럼 검은 피부가 되어버린 포도원지기 출신에 불과했다(아가 1:5,6). 그럼에도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사랑했던 유일한 연인이었다.

그런 술람미 여인을 솔로몬은 당당히 왕의 신부로 맞이했고(아가 4:8-5:1), 이를 통해 예수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교회와의 혼인을 예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남녀간의 온전한 사랑의 모습이다. 사랑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결혼이란 언약의 띠로 묶여질 때에야 비로소 지고지순(至高至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베르테르가 겪었을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절로 느껴진다. 실연 끝에 베르테르는 자살을 선택했다. 그에게 다른 선택의 길은 과연 없었던 것일까? 성경의 관점에서 자살은 무엇인가?

자살은 내 생명의 주권을 내가 갖는 것이다. 믿음은 언제나 삶의 주권과 직결되어있다. 믿음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욥기 1:21) 라고 욥이 고백했듯이, 내 삶의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자살을 통해 그 주권을 자신이 행사하였다. 그것은 믿음의 길이 아니다. 성경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 죄(로마서 14:23)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베르테르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했을까?

다윗이라면 이럴 때 하나님께 나아가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1)라고 부르짖으며 그분께 실연의 아픔을 토해냈을 것이다.
베르테르 역시 그랬다면, 시편 23:3 에서 다윗이 누렸던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것이 베르테르의 고백이었으면 참 좋았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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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연세대정외과 졸업, 코람데오 신대원 평신도지도자 과정 수료하고 네이버 블로그 소설 예배를 운영하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조건도 구원에 덧붙여져선 안된다는 메시지를 어른이 읽는 동화의 형식에 담아 연재해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