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셋째 주 찬송/2월 넷째 주 찬송

2월 셋째 주 찬송/580장(통일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서울 출신인 남궁억 선생은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고종황제의 통역관과 전권대사의 통역관으로 일하였고, 해외 순방을 통해 서양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개화에 힘썼습니다. 1895년 내부(內部) 토목국장 재직 시엔 주택개량과 서울 종로거리를 확장 정리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의 탑골공원은 바로 그가 건립한 것입니다.

그는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한 독립 운동가이며, 1898년엔 ‘황성신문’을 설립한 언론인으로서 일제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나라의 독립과 자존의 민족운동에 힘썼습니다. 또한 흥화학교, 현산학교, 배화학당, 상동청년학원의 교사를 지내기도 했지요. 교육자로서 국어, 국사 교과서를 저술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소명을 일깨운 분입니다. 그야말로 애국자이십니다.

남궁억 선생은 1918년, 병약하여 모곡(牟谷)에 내려가 요양하면서도 교회를 세우고, 모곡학교를 세웠는데요, 이곳에서 ‘무궁화동산 꾸미기운동’을 벌였습니다. 암울한 일제하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우신 계몽가이기도 합니다.

남궁억 선생은 이곳에서 1921년, 노고산과 수산이 홍천강과 어우러진 강산을 바라보면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무궁화심기운동과 함께 부른 이 찬송은 삽시간에 전국을 휩쓰는 히트곡이 되었지요.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37년 드디어 전국적으로 이 찬송에 대한 금지령을 내리고 우리의 국화인 무궁화까지 모조리 뽑아 버렸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그는 차디찬 겨울, 일제 치하에서도 “봄 돌아와 밭 갈 때니”라 노래하며 장차 맞이할 해방을 그렸고, “곡식 익어 거둘 때니”하며 이 땅에 이루어질 번영된 조국을 내다보았습니다.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 날에 일 가려고 그 누가 대답을 할까” 이 장면에선 이사야가 지녔던 사명감을 생각나게 합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이사야 6;8)

“곧 이 날에”의 시제(時題)는 절(節)마다 다릅니다.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1절은 일제의 폭압의 암울한 현실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진 일꾼을 찾는 것이요, “봄 돌아와 밭 갈 때니” 2절은 곧 맞이할 광복의 때 일굴 개척의 일꾼을 찾는 것이며, “곡식 익어 거둘 때니” 3절은 꿈의 나라 풍요로운 조국 강산에서의 일꾼을 찾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궁억 선생은 후렴에서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명령”이라고. 이 국토를 되찾고, 지키고, 가꾸고, 열매를 거두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니 어서 나서라는 것이죠.

그때에는 단지 빼앗긴 이 나라 조국강산을 일제에서 되찾아야 할 애국가로 불렸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부를까요? 동토(凍土)의 땅 반쪽아리 북녘 땅을 향한 노래로, 죄악으로 물든 이 조국강산을 하늘의 꽃향기 가득 풍기는 주님의 나라로 일굴 사명으로 재해석하며 부르면 어떨까요.

‘삼천리 반도’에서 ‘솔도미솔솔’하며 조약 진행하는 음형(音形)은 잠자는 민족을 깨우는 기상나팔소리 같지요? “하나님 명령”에서 ‘도미솔도도’는 그 옛날 여리고 성 앞에서 여호수아에게 들렸던 하나님의 임재의 나팔소리로 들립니다. 바로 이 소리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늘의 트럼펫 소리로 들려오길 바랍니다.

2월 넷째 주 찬송/436장(통일493)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성가대석은 스테이지가 아닙니다.” 대학에 입학하던 1963년 봄, 연세대 강의실에서 강의 첫 시간에 들은 박태준(朴泰俊, 1900-1986)박사의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습니다.

당시 그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종교음악과 과장으로 계셨는데, 찬양대 자리는 자신을 마음껏 뽐내는 연주무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자랑을 위한 자리로 찬양도 그렇게 겸손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찬송은 수영하기 전의 준비운동 같이 설교를 장식하거나 기분전환을 위한 것이 아니다.” 라며 예배 시작 전에 흔히 쓰는 “찬송하면서 이 앞자리에 나와 앉읍시다.”라는 말을 금하였지요. 찬송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가장 감격적인 예배이지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평생 남대문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신 그는 교회에서 성가대지휘자는 음악목사(music minister)나 음악교역자(music director)이기에 집사나 장로의 직분 받는 것이 적합지 않다고 여겨 교회에서 장로 피택을 받았음에도 극구 사양하였답니다. 당신 자신이 몸소 음악목회자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보이며 살아 많은 후배와 제자 교회 음악인들의 존경을 받아 왔지요.

표피적인 재미보다 은혜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그의 작곡정신이며 교회음악철학입니다. 그가 작곡한 이 찬송은 거의 점음표가 없고, 사분음표(♩) 중심의 음절식(音節式, syllabic style)입니다. 가장 모범적인 찬송으로 일컫는 ‘거룩 거룩 거룩’(8장), ‘전능왕 오셔서’(10장)처럼 무게가 있지요.

국제예배컨퍼런스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기회가 많았던 그는 가끔 한국적 찬송에 대한 고민을 전하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찬송은 7음계(音階)중에 ‘파’(fa)와 ‘시’(si)가 빠진 ‘도 레 미 솔 라’ 다섯 음만으로 되어있어요. 동음(同音)진행이 많고, 어딘가 모르게 우리 고유의 장단이 스며있습니다.

박태준 박사는 대구 태생으로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인 대구 계성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33세 때 유학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타스컬럼(Tusculum)대학을 거쳐 웨스트민스터합창대학(Westminster Choir College)과 대학원에서 교회음악을 공부하였죠. 귀국한 후에는 연세대에서 종교음악과를 창설하고, 음악대학 학장도 하였습니다. 박사학위는 우스터대학에서 받은 것입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노래하는 ‘오빠생각’ 등 많은 동요와 ‘동무생각’(思友), ‘산길’ 등의 가곡, ‘주 예수 흘린 피’(개 473장), ‘어둠의 권세에서’(개 172장) 등을 작곡하였고, ‘교회음악사’, ‘찬송가학’등의 번역서를 남겼습니다.

한국오라토리오합창단을 창단하여 ‘메시아’, ‘천지창조’,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바울’, ‘엘리야’ 등 많은 오라토리오와 교회음악을 초연하였는데요, 우리나라 음악계의 발전에도 기초를 놓는데 큰 역할을 하였죠.

한국음악협회장, 한국교회음악협회장, 예술원회원 등을 역임하였고, 국민훈장도 받았으니까요. 곡명 주 함께 살리라의 작사 작곡 년대를 보면 1967년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개편찬송가를 편찬한 해이지요.

찬송 시 ‘부름 받아 나선 이 몸’(323장)을 지은 이호운(李浩雲, 1911-1969)목사는 평남 강동 태생으로 감리교 대전신학교(현 목원대학) 교장을 역임한 분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는 말씀을 주제로 한 찬송이 여러 편 되지만(421장, 431장, 551장, 554장 등) 이 찬송이 그 중 최고이지요.

서울역 앞 남산 기슭 남대문교회 옆 뜰엔 박태준 박사 찬송가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기념비가 있습니다. 2011년 11월, 박태준 박사 탄신 111주년과 교회음악협회 60년을 맞아 세운 것인데요, 제자인 제가 그분이 지휘하시던 남대문교회 찬양대 지휘자로서 기념연주와 기념사업에 한 몫을 할 수 있었음에 큰 영광과 자랑으로 여기며 감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