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

사마리아를 통과하던 예수님은 일부러 우물가 쪽으로 가셨다. 그날 그 자리에서 꼭 만나야만 하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는 조용히 물을 길고 있던 한 여인에게 말을 거셨다. 여인은 아무도 물 길러 오지 않는 대낮에 우물가에서 물을 길고 있었다.
상호 간에 적당히 대화가 오갈 무렵, 예수님이 직설적으로 여인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네 진짜 남편이 누구냐?’
거침이 없다. 이런 직설적인 질문은 여인 앞에서는 아무도 꺼내지 않는 민감한 주제였다.
교양시민이라면 상대의 민감한 주제를 함부로 끄집어내선 안 된다. 그저 속으로 긴 자신만의 판결문을 읊을 뿐이다(놀랍게도 판단 받는 사람은 그 느낌을 기막히게 안다). 그렇게 대화의 포문을 연 질문 속에서 여인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목마름’과 직면한다. 그리고 ‘예수’라는 해답을 얻는다.

그림 속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오른편에 앉아있다.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여자.
옛날 어른들 표현으로 ‘팔자 드센 여편네’ 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여인을 약간 ‘쎈 언니(요즘 표현으로)’ 느낌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반대편에 서 있는 바리스타 예수님은 캐터필터를 손에 들고 여인의 얘기를 듣고 있다. 막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내리기 전이다.
’당신이 야곱보다 큰 자이니이까!?’
예수님의 질문 공세에 언니는 되바라지게 받아친다. 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 ‘쎈 언니’ 앞에서 예수님의 미소는 흔들림이 없다. 네 마음을 이미 이해한다는 표정이다. 아니, 사람은 원래 다 그렇다는 표정이 맞을 것 같다. 예수님한테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나는 아내를 다섯이나 갈아치울 정도의 능력(?)은 없었지만 리더를 다섯이나 바꾼 적은 있다. 선교단체 리더부터 목사님들까지…
내 목마름을 채워준 리더가 있었을까? 그런 지도자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실망하고 떠나고, 또 다른 리더를 찾고… 패턴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다섯 명의 리더를 갈아탔다.
리더들에게 실망하고 나 자신에게 실망하다가 결국에는 절망했다. ‘내가 찾는 리더는 세상에 없는 것인가?…’ 그러다 마흔이 훌쩍 넘어 결국 깨닫게 됐다. ‘그런 리더는 없다!’(내 글이 영적 지도자나 교회 목사님들을 비판하는 글이 아님을 명확히 밝힌다. 그런 의도로 활용되는 것조차도 반대한다).

진짜 원인은 리더가 아니었다. 원인은 ‘나 자신’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하다. 하나님도 그 사실을 잘 아신다. 세상의 어떤 위대한 리더라도 모두 명암을 가지고 있으며
보이는 훌륭한 면모만큼, 보이지 않는 약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그저 한 사람의 강점만을 들어 사용하실 뿐이다.
너무 잘 아는 상식이었지만,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자란 나는, 아버지에게 못 받은 사랑을 리더들을 통해 충족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결국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버지’를 찾아 헤맨 것 아니었을까? 나만큼이나 연약했던 그 분들에게서(아버지조차도 나와 같이 연약한 한 남자일 뿐).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라는 명언처럼, 사람이란 존재를 내 이상적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한다. 모든 권위자들을 그저 나와 같은 ‘한 명의 인간’으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다.
사람은 사람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없고 채워줄 분은 오직 사람을 뛰어넘는 존재여야 함을… 2000년 전 ‘예수’라는 해답을 찾았던 그 ‘쎈 언니’가 오늘 다시 조명해준다. 직설적이고 거침없던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