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공식적인 한국의 이민자,나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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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과 하네다 공항에서 작별하고 7시간을 기다려 시드니행 비행기를 탔으며 그 비행기는 DC-10으로써 쌍발여객기였다.

일본을 떠날 때는 날씨가 좋았었지만 다섯 시간이 지난 다음부터는 시내버스 이상으로 흔들렸으며 기압골에서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비행기 내에서 한잠도 자지 못하고 호주의 시드니에 도착하기까지 7시간 이상 흔들려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이 습관이 되어 비행기를 탈 때마다 잠을 자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하네다 공항에서 시드니까지 12시간 반이 걸렸지만, 아내는 내 옆에서 잠을 잘 자고 있었으며 시드니에서 3시간을 기다려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탔다.

시드니에서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까지 3시간 반이 걸렸으며 웰링턴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치고 나갔을 때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친구이자 재정보증인이며 국회의원인 그가 마중을 나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마침 국회가 회기 중이며 휴식 시간이라 나올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친구를 만났을 때 “환영, 공식적인 한국의 이민자, 나의 친구들”이라고 반겨 주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국회의원 사무실에 있는 동안, 친구인 그는 주방에 들어가 샌드위치를 만들어 왔다. 비서는 없느냐는 질문에 국회의원 세 사람에 공식 비서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국회의원이란 주민의 대변인이란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국가와 지역구민을 위한 헌신의 마음이 없으면 국회의원을 할 수가 없는 곳이 바로 뉴질랜드임을 알게 되었다.

뉴질랜드 국회의원의 대부분은 비서가 없다. 집에서는 결혼했으면 주로 부인이 비서 역할을 하며 그렇지 않은 분은 가족 중 한 사람이 비서 역할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비용을 지급하여 비서를 고용해야 한다.

뉴질랜드 국회의원은 매주 화요일이면 첫 비행기로 국회의사당이 있는 수도 웰링턴에 도착하여 국회의원 주택(flat)에 거주하며 인근에 있는 국회의사당까지 주로 걸어서 다닌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마지막 비행기로 선거구로 돌아가며 공항까지의 마중은 주로 부인이나 형제 혹은 자매가 나온다.

국내 비행기 삯은 생각 외로 비싼 곳이지만 국회의원은 무료탑승권이 있으며 국고로 지급이 된다고 한다.

국회의사당에는 우체국이 있었다. 친구의 안내로 우체국에 들러 지참한 미국 달러와 일본 돈을 모두 환전을 한 결과 뉴질랜드 달러로 정확하게 1,000달러(US$1.20=NZ$1.00)였다.

이것이 우리 두 사람을 위한 이민 정착자금의 전부였으며 우리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주급이 $65.00으로서 1,000달러면 15주의 주급이었으며 약 4개월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국회의사당에서 지루하지 않게 세 시간을 기다리며 최종 목적지인 헤이스팅스(Hastings)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국내 공항까지는 국회의원의 친구가 안내를 해주었으며 웰링턴에서 헤이스팅스까지는 1시간 정도 걸렸다.

서울에서 종착지인 헤이스팅스까지 1박 2일 동안 19시간을 기내에서 지났으며 멀미를 잘하는 아내는 희색이 되어 네피아 공항에 도착하였다.

친구의 부인이 어린 아들(8세)과 딸(5세)을 데리고 공항에 마중을 나와 있었으며 목적지인 헤이스팅스와 네피아 공항까지는 자가용으로 25분 정도의 거리였다.

친구 부인이 준비한 양고기 요리로 뉴질랜드에 도착한 저녁 식사를 맛있게 먹고 밤늦게까지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뉴질랜드에 도착하여 헤이스팅스로 온 것은 재정보증인이었든 뉴질랜드 친구가 살고 있었으며 일자리가 헤이스팅스에 있는 제조회사였기 때문이었다.

6월이면 뉴질랜드의 겨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민을 온 1974년 6월 5일의 하늘은 푸르고 높았으며 날씨는 따사로워 마치 한국의 가을처럼 느껴졌다.

재정보증인이었던 그 친구의 주택 뒤쪽에 있는 숙소인 거실과 침실 하나, 주방과 화장실이 있는 플랫을 집세를 내고 사용하기로 하였다.

플랫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가구를 모두 준비해 주었으며 짐을 풀고 뉴질랜드의 첫 생활이 시작되었다.

친절한 친구 부부의 배려로 우리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가재도구를 모두 준비해 주었기 때문에 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한식은 흉내도 낼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고춧가루와 마늘과 배추인데 친구 부인에게 물어보았으나 살 수가 없단다.

친구의 부인이 헤이스팅스(당시 인구 5만 정도) 시내에 있는 푸림리(Primly)공원과 콘월(Cornwall)공원, 그리고 펜타시 랜드(Fentasy Land)와 태마타 픽(Temata Pick)을 구경시켜 주었다. 가는 곳마다 그림과 같았다.

어린아이와 같이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38세의 젊음을 담보로 이역만리 뉴질랜드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뉴질랜드의 공식적인 한국인 이민자라는 것 때문에 모든 행동과 언사와 사귐에 실수가 없도록 신중히 처리했다. 한국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으면 앞으로 이민을 올 한국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게 되리라 생각했다.

누구와 약속을 하면 15분 전에 먼저 가서 기다렸다. 처음 찾아 가는 곳은 한 시간 전에 가서 집을 확인한 다음 승용차 안에서 기다렸다가 약속 시간을 꼭 지켰다.

승용차 안에서 지루하게 기다리던 아내가 한마디 했다. “약속시간에 늦는 것을 코리안 타임이라고 하는데 약속시간 보다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것은 무슨 타임이지?”

“그것도 코리안 타임이지?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일찍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나의 대답이었다.

내가 뉴질랜드에 정착한 지 한 달 만의 일이다. 친구 부인의 도움 없이 시장을 갔었다. 그 당시 슈퍼마켓은 오후 5시 반에 문을 닫았다.

지역별로 목요일 아니면 금요일 저녁에는 슈퍼마켓과 타운의 가게들이 저녁 9시까지 문을 열었다. 낮에 일하는 사람들은 그 시간에 쇼핑을 한다.

우리들은 승용차가 없었기 때문에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걸어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슈퍼마켓에 가서 시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발이 아프다고 했다.

천천히 걸었지만 통증으로 견딜 수 없게 된 아내는 구두를 벗어들고 가겠다고 했다. 한국 사람의 좋은 이미지를 지나치게 생각한 나머지 불빛이 있는 곳에서는 신고, 어두운 곳에서는 벗고, 가기로 의견이 일치되었다.

집에 도착해서 아내의 발가락과 뒤꿈치가 벗겨져 피가 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 후 어느 날, 낮 시간에 타운을 가게 되었는데 날씨가 따뜻한 겨울 날씨라 맨발로 다니는 뉴질랜드 사람들을 보고 한국 사람의 좋은 이미지 때문에 생으로 고생을 한 아내가 측은하게 생각되었다.